서론
난 삶의 등락이 뚜렷한 편이다. 그리고 지금은 낙의 시기에 있다. 건강이 무너지면서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렸다. 파열된 디스크만 회복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신우신염이 온 것도 모자라 폐에 물이 차더니, 코로나까지 꼽사리 껴서 협공을 당하는 중이다. 가히 나당연합군에 뚜드려맞는 고구려의 신세와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이정도 신호는 모든 것을 멈추고 쉬어가라는 신호다. 물론 이런 낙의 시기는 처음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한 번, 대학교 때 한 번, 사회초년생 때 한 번, 이미 총 3번 겪었고, 지금이 4번째다. 때문에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역시 힘들긴 더럽게 힘들다. 뭐 그래도 이정도인게 어디인가. 암같은 뒤끝 지독한 질병이 아님에 감사하다.
난 보통 고난의 시기를 맞이하는 시점을 스스로의 선택이나 정신적 번아웃으로 맞이하기보다는, 몸이 못버텨서 얻어맞는 방법으로 맞이한다. 정확히는 인식을 그 시점에 한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고등학교땐 위출혈, 대학교땐 신기능 저하와 혈뇨, 사회초년생땐 요로결석, 이번엔 신우신염이 그 시점이었다. 디스크 파열은 시발점이긴 하지만, 이때까지 난 완전히 낙의 시기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그냥 쉬면 다 해결됐기 때문에, 그냥 두번째 요로결석처럼, 슥 지나가는 기우인 줄 알았다.
매번 이렇게 건강 문제로 무너지다보니, 하루이틀 사이에 급격히 안좋아진다. 대신 몸만 회복되면 알아서 잘 회복되는 편이다. 그리고 몸이 회복될 때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이 항상 있었다.
1.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는 것도 일이다. 사람을 만나면 필히 그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렇다고 안 괜찮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주변에도 스트레스를 전파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몇몇에게 안 괜찮음을 알리고, 이후부턴 말을 아끼고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고독을 즐기는 것은 후에 자신의 능력이 될 것이다. 내가 군자녀로서 잦은 이사와 이별을 유년시절부터 겪어 오며 단련되었듯 말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 엄습하는 불안은 실체가 없고, 근거도 없고, 쓸모도 없다.
2. 생각하지 말고 몸이 이끄는 대로 생활한다.
자고싶으면 자고, 먹고싶으면 먹고싶은걸 먹는다. 억지로 생활 습관이니 뭐니, 보양식이 어쩌니 영양제가 어쩌니 요란하게 챙기지 않는다. 그런거 알아보고 계산하는 것이 더 스트레스다. 몸은 필요한게 뭔지 스스로 알고 있다. 이상하게 땡기는 음식을 놓치지 않고 먹는다. 난 이번에 아프면서 바깥 음식이 별로 땡기지 않았다. 몸이 알아서 염분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항생제를 먹기 시작하고 신우신염 증상이 완화하니 뜬금없이 닭강정이 땡기고 식욕이 올랐다.
보통은 자신을 망가뜨린 원인은 휴식을 하면서 차단되므로 이미 충분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보통 사람의 의지력으로는 몸을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죽음의 사이클로 올려놓기 어렵다. 왠만하면 회복 사이클이 해결해 준다. 각종 생각은 버리고, 그저 조금 긴 감기에 걸렸다 생각하며 꿀같은 휴식을 온전히 즐겨야 한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3. 집중력을 회복의 척도로 삼는다.
집중력이 크게 저하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은, 그간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왔던 관성에 의해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인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몸상태는 이를 받쳐주지 못한다. 떨어진 집중력이 본인의 의지력이라 오판해서 자괴감이 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초조해 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했다시피, 생각을 멈춰야 한다. 어차피 당장 안될거다. 악담이나 저주가 아니다. 팩트다. 어차피 안될 일에 스트레스 받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일은 회복되고 나서 해도 전혀 늦지 않는다. 회복을 빠르게 하는 편이 더 이득이고, 회복을 가속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차단해야 한다. 대신 자신이 평소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일들 중에서 기한없는 목표를 하나 정해 놓고, 하고 싶을 때 툭툭 건드려 보며 집중력을 체크하면 현재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스트레스도 받지 않으면서, 언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의욕이 돋으면서 일을 손에 잡더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고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면, 몸은 스트레스를 다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일상을 찾아가게 된다.
4. 인생에 대해 회고를 진행한다.
최고 속력을 내기 위해선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때문에, 멈춰선 지금은 뒤를 돌아볼 절호의 기회이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뒤를 돌아보나.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생긴다. 회고를 진행하다 보면,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 인생의 우선순위 등이 정리된다. 우선순위가 명확해지면 앞으로의 일에 있어 판단 기준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 때로는 성격까지 크게 변화하기도 한다. 회고는 언제 진행하면 되냐고? 3번이 힌트를 줄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하고싶어지면 하면 된다. 자신을 믿어라.
회복 후
회복이 되었다는 판단은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으로 복귀하고, 하고싶은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바로 회복이 완료되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비슷한 고난은 여러번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방식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내가 매번 건강 이슈가 터져서 더이상 앞으로 갈 수 없는 시점이 되어야 멈춰서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또다시 고난이 찾아올 것이다. 왜 또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가에 대해 한탄하지 말고, 그냥 “아 또 쉴 때가 됐군!” 하고 회복 사이클을 돌려라. 원래 반복된다. 그리고 그 때 제대로 쉬고 싶다면, 평소에 열심히 살아서 이럴 때 제대로 쉴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는걸 추천한다. 직장인으로서는 이번이 처음인데, 디스크 파열이라는 신호탄이 터졌을 때 팀에서 비로소 나에게 몰려 있던 버스펙터를 높이기 위한 급진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좀 늦어서 고생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개혁에 힘입어 이번에 완전히 무너졌을 때 휴가를 마음놓고 쓸 수 있었다(심지어 돌발적으로). 2년 근속 때 받는 리프레시 휴가를 라크로스 국제대회 때 사용하겠다고 1년 넘게 안쓰고 아껴 뒀던 것도 이번에 큰 도움이 됐다. 국제대회는 연차로도 충분하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계속 쟁여뒀었다. 그 리프레시 휴가, 정말 리프레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이 글이 올라왔다는 것은?
맞다. 난 지금 무사히 회복 중이고, 방금 집중력 회복이라는 강력한 신호를 받았다. 현재시각 새벽 3시 43분이다. 잠을 자다가 불편한 호흡, 흉통, 기침으로 뒤척이던 중, 갑자기 떠올라 글을 써내려갔다. 일단, 지금 매일밤 찾아오던 발열 증상이 멎었다. 잠을 청할 때만 해도 열이 났는데, 지금은 열이 내렸다. 이 시간에 쉬어도 모자랄 판에 왜 각잡고 글을 쓰냐고? 몸이 이끄는 대로 했다. 어차피 숨이 불편하고 열이 나서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였다. 이제 열도 내렸으니 다시 잠을 청하고, 눈떠지면 일어날 것이다. 이번 휴가는 이번주 내내이다. 강력한 회복 신호는 받았지만, 꿀같은 휴가를 더 신나게 누려서 확실히 회복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