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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nking ]

공포의 대상보다 공포의 영향이 더 위험하다.

공포 마케팅은 한국에서 가장 잘 통하는 마케팅 중 하나이다.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안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는 줄 안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다. 새롭고 획기적인 것을 찾아 불나방처럼 돌아다니기도 한다. 공포 마케팅을 하는 대표적인 업계는 사교육, 그리고 헤드헌팅 업계이다.
하지만 성장은 눈에 보이는 성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난하고 지루하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오는 것이다. 성과는 그것이 한 번씩 드러나는 과실에 불과하다. 사과나무의 본체는 나무이지, 사과가 아니다.

ChatGPT? 그녀석은 그냥 부하 직원같은 존재다. 게다가 머리가 애매하게 좋은 녀석이다. 리더가 얕보이는 순간 그놈은 리더를 속이려 들 것이다. 지식에 대한 지능은 높지만 사회지능이 없거나 낮은 인간의 특성과 동일하다. 물론 그녀석이 매니저를 대체할 수는 있겠다. 그 윗 라인을 속여먹으려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명확하다. 그리고 바뀐 것이 전혀 없다. 우린 이미 정보화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이라 배웠다. 그것은 바뀐 것이 없다. 그걸 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쓰는 능력 자체를 길러야 한다. 단편적인 지식은 당장은 진리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일회용품에 가깝다.

문제의 그 AI라는 녀석은, 지금 특히 프로그래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그 외 여러 직군들도 마찬가지인 듯 하지만, 요바닥은 거의 집단 우울증에 걸린 듯한 모습이다. 뭐해먹고 사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난 확신한다. AI의 희생자가 될 사람은, 실제로 AI에게 먹혀서가 아니라, AI에 대한 공포에 휘말려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일 것이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그 AI라는 녀석을 써서라도 생산성을 몇배나 더 향상시킨 상태로 그들의 빈자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채용이 줄어들 것은 뻔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난 과거 파쿠르를 했었다. 꽤나 몰입했었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했었다. 당시엔 원류의 철학이 대세였던 시절이었다(훈련도 지옥훈련이었다 ㅋㅋ). 내가 파쿠르 철학 중 깊히 새긴 것은 아래와 같다.

  1. 유용하기 위해 강해져라.
  2. 다같이 시작해서 다같이 끝낸다.
  3. 넘어지는게 두려우면 그 두려움 때문에 넘어지게 된다.

현대의 AI에 대한 공포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은 3번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살아님기 위해서는 1번과 2번을 실천하면 된다. 물론 2번은 사람에 따라 의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파쿠르철학에서 2번은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일리가 있다. 사람마다 강점과 약점이 다 존재한다. 결국 가능하다면,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 누군가는 낮은 담을 잘 넘고, 누군가는 높은 담을 잘 넘는다. 누군가는 체구가 작아 좁은 틈을 잘 비집고들어가고, 누군가는 힘이 좋아 도약을 위한 발디딤을 도와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 사람들을 화목하게 유지시키기도 한다. 모두 능력이다. 높은 담을 넘을 때, 발디딤을 도와주면 말도 안되는 높은 담에 오를 수 있다. 그 사람은 거기서 다시 밑에 있는 사람을 잡아줄 수 있다.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은 담을 못오르는 사람을 잡아줄 수 있다. 도약을 도와준 사람도 마찬가지로 담을 오르게 된다.

장애물은 낮은 펜스만 있는게 아니다. 낮고 넓은 장애물도 있고, 높고 얇은 장애물도 있고, 높고 넓은 장애물도 있다. 울퉁불퉁하기도 하고, 미끄럽기도 하다. 그건 내가 바꿀 수 없다. 그냥 거기에 있다. 그냥 저기서 나타난다. 심지어는 갑자기 달려드는 자동차도 하나의 장애물이다. 장애물이 원하는 모양이 아니라 해서 그걸 탓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그렇게도 무서워하는 도태의 지름길이다.

어른이 더 좋은 점

다들 어른이 되고 나서 힘들다 힘들다 하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어른이 되면 자기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케어를 받던 시절보다 몇 배로 고달프고 힘든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하나씩 공략하는 맛도 있다. 초 고난이도 RPG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자.

케어를 받는 대가

다들 자기가 케어를 받기만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없지 않았다. 물론, 가족 뽑기운에 따라 이 대가의 크고 작음이 다르다. 누군가는 부모님이 강압적이어서 부모님 그늘 아래 꼭두각시처럼 살아야 하는 대가를 치른다. 누군가는 부모님의 인성이 나빠 스트레스를 지고 산다. 누군가는 부모님이 아프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어 소년/소녀가장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물론 이 경우 케어를 받는다고 하긴 어렵겠다). 또 누군가는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꿈을 이루기 위해 드라이브를 걸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적당한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산다. 이건 다 뽑기운이다. 태어나는 것 자체도 내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유전자와 기질도 모두 뽑기운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린 대부분 학교에 다니면서, 얕디 얕은 다양한 과목을 공부한다. 연결고리를 하나씩 생략해 둔 채 암기를 요구한다. 내가 그 과목에 관심이 있든 없든, 어느 정도 강제적으로 그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럼 그게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폭넓은 분야를 접하고 그에 대해 사고해보는 것은 인간으로서 기본 덕목을 기르는데 필수적이다. 말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 위한 밑바탕이 된다. 물론 모두가 그걸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것들을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능과 대입에 도움이 안되는 과목들에 대해 아이들 학습로드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학부모들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학습 로드를 가중시키는 것은 학교가 아니라,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 부모들이다. 어차피 과목수 줄여도 애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학원 뺑뺑이를 시키는건 매한가지일 것 아닌가. 문이과를 분리하고, 미적분을 없앤다 한들, 애들이 학원을 덜 다니고, 놀아야 할 때 더 놀았을까? 아니다.

또 한 가지, 그 시절은 점수가 전부인 것처럼 돌아간다. 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해도, 그냥 점수로 요약된 후 대입에 소비하고 끝내버린다. 그리고 그 스토리들은 스스로 잡고 있지 않는 이상 휘발된다. 마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다행스럽게도 이 현상은, 연구/사무직군에 대한 투자 대비 매력도 하락으로 인해 꽤나 완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자 스탯이 많이 찍혀 있는 대로 직업을 가지고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의 중심에 있는 세대는 기성세대들과 한바탕 침튀기게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없는, 반대로 강요받을 수는 있는 그것이 바로 케어를 받는 대가이다.

어른이란

어른은 뭐 크게 대단한게 아니다. 내가 정의내린 어른의 기준은, 그냥 자기가 자기 입에 풀칠하는걸 스스로 하는가이다. 경제적인 이야기를 한거같지만, 그걸 시작으로 어른이 가지는 힘든 점과 좋은 점이 모두 따라온다. 구분하기 쉽도록 예시를 두 개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1.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어른일까? 만약 부모님과 함께 사는데, 그 가구에서 경제적으로 일조하고 있다면 어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모든걸 빌붙으며 자기가 번 돈을 그저 모으고 있다면, 그건 어른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반발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자기 나름의 계산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앞으로의 삶에 아주 유리한 방향은 맞기 때문이다.
  2. 부부 중 한 명이 전업주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 아닐까? 아니다. 어른이다. 부부는 법적으로 경제공동체로 묶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기여하는가가 중요하다. 전업주부는 가사노동을 통해 그 가정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외식, 돌봄 및 교육에 관한 비용이 추가로 들게 된다. 근데 만약 전업주부이면서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면? 맞다. 그건 어른이 아니다. 만약 그 부부가 이혼했을 때, 한 쪽이 감정적인 부분 이외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한 쪽이 어린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의할 것이 있다. 어른이 꼭 더 좋고 훌륭하고,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개념은 오류다. 모두 그냥 인격체다. 부모님과 함께 살며 자기 몫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은 결국 잘될 것이다. 감정이나 이상보다는 현실을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케어를 하는 주체가 객체를 그정도로 소중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그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난 어른으로서 살기를 택했다. 그래서 위와 같은 기준에 따라, 일산의 부모님 소유 주택에서 지하에 방을 얻어 살 때, 매달 월세 명목으로 30만원을 부모님에게 송금했다. 증여세, 상속세 등의 세금 관점에서 봤을 때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이게 바로 적당한 집안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내 기준을 지키기 위해 일정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것이 내 특권이다. 만약 우리 집안에 재산이 많았다면 이건 꿈도 못 꿀 것이다. 나라로부터 뚜드려맞을 세금폭탄이 두려워서라도 자기 기준을 져버리고 세금에 최적화된 재무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걸 모두 포기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마음먹기 더 어렵겠지만 말이다.

어른이 되면서 힘든 점

생각보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게 힘들다. 어른은 곧 경제적 독립이라 했다. 그 독립은 일자리를 구하거나 사업을 해야 가능해지는데, 결국 사회의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철광석을 갈고 갈아 결국 어디든 맞는 자리에 끼워넣는 것인데, 이게 쉬울 리가 없다. 수많은 충돌과 연마를 겪으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게 되는데, 그 수준은 거의 생사를 오가는 수준이다. 부모와 학교의 보호를 받으며 자아관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린이의 특권이다. 복권을 긁기 전에 그 복권의 결과는 자기 원하는 대로 상상해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은 현실 속에 살아야 한다. 거기서 어린이는 한 번 이상 죽는다.

자기인식 자체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공학자와 기술자 중에서 뭘 할 것이냐 하고 이야기하며 은근하게 기술자를 까는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학교를 다녀놓고, 난 기술자가 됐다. 마치 건축공학과에서 5년(설계 포함 과정)을 수료해 놓고, 자기가 설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현장의 인부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깎아놓고 보니 그곳이 자기 자리였던 것이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도 정말 어렵다. 하루 24시간 중 8시간을 업무에, 8시간을 수면에 할애하고 나면, 8시간이 남는데, 여기서 3시간은 요리하고 먹고 정리하는데 써야 하고, 2-3시간은 출퇴근에 사용해야 하고, 남은 2-3시간에 비로소 자기계발과 여가활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조차도 야근 한 번에 날아가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다른 뭔가를 줄인다. 잠을 줄이거나, 집안일을 미루거나, 끼니를 패스트푸드로 대체하거나, 거르거나. 그리고 그것이 건강을 서서히 망친다.

어른이 되면서 얻는 것

경제적 독립은 아주 많은 것들에서 자신을 해방시킨다. 대표적인 것이, 부모님이 내 삶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된다. 내 앞가림만 제대로 하면, 터치를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대학 졸업 후에 오히려 라크로스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과거 부모님은 내가 라크로스 때문에 고생했을 때 “니 앞가림에 더 신경써라” 라는 꾸중을 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라크로스에서 얻은 것들이 더 많음을 인정해 주신다. 심지어는 기부를 해도 그냥 “이제 그럴 때가 됐구나?” 해주신다.

기한없는 공부도 가능해진다. 학창시절의 시험이라는 제도는 공부의 기한을 정해버리고, 깊게 파는걸 방해한다. 깊게 파면 시간이 많이 들고, 시험 점수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의 공식을 그냥 외우면 한 시간 정도에 몇 문제를 맞출 기반을 얻지만, 그 근의 공식을 직접 유도하고 있으면, 유도 후에 시험을 위해 외우는 시간이 따로 더해지거나, 실제 시험장 가서도 시간을 들여서 근의 공식을 유도해야 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그에 반해, 기한이 없는 공부는 근의 공식을 유도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공부의 맛이다. 새로운 것을 이해한 순간, “아하!”와 함께 쾌감을 느낄 것이다. 마치 머리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갑자기 정렬하면서 그 사이에 길이 직선으로 뚫리는 느낌이다.

또한, 만약 자신이 뽑기운이 좋지 않아 어릴 때부터 과한 짐을 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자립을 계기로 그 짐을 벗어던질 수도 있다. 부모는 자식을 “태어나지게” 한 대가로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 자식의 탄생은 부모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덴 자식의 선택권이 더 크다. 자식이 적당할 때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의할 기회는 꼭 온다. 그리고 그 시점에 자식에게 선택권이 생긴다.

사회에서 갈리는 과정 또한 결과적으로 이득이다. 자신이 본래 가야 했던 자리를 알고 난 이후엔 묘한 안정감도 얻는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미래를 그리는 것은 엄청난 불안을 수반한다. 그 사람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장단점을 명확히 알아가게 된다. 직접 부딪혀 봤고, 실패할건 실패하고 성공할건 성공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장단점을 아는 상태에서 미래를 그리면 미래를 좀 더 명확하게 그릴 수 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안다고 해도,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만 집중한다면, 적어도 졌잘싸는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 방법은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삶의 블랙스완 제거하기

서론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소감문을 쓰다가 언급한 그 블랙스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해로운 사람. 그것을 난 블랙스완으로 묘사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 줄은 모르지만, 걸리면 꽤나 큰 타격을 입는, 그것이 블랙스완이다. 그럼 그 해로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랑 안 맞는 사람일까? 아니다. 안 맞는건 그냥 안 맞는거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 맞다는 것을 확인하였음에도 그 사람이 해로운 사람 축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나쁘지 않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이 정도가 최저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난 Taker적 성향을 가진 사람을 해롭다고 여긴다. 심리학에서 나오는 개념이었는데, 쉽게 말하면 기업가도, 사업가도 아닌 장사치를 뜻한다. 그 장사치적 성향이 일상에도 발현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Taker다. 조금이라도 더 얻어가려는 사람. 조금이라도 덜 내주는걸 고민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눈치를 살살 보며, 먹잇감이 될 Giver를 찾아다닌다. Matcher는 계산이 빨라서 다루기 힘들기 때문이다.

Taker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알을 재빨리 꺼내는 사람과, 거위를 잡아서 우리에 가두는 사람이다. 전자는 그냥 일상 생활 속에서 접하기 쉽고, 파급력도 약하다. 바가지를 씌우는 장사치 정도의 포지션이다. 하지만 후자에 걸리면 정말 인생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블랙스완을 제거하는 것은 삶에서 아주 중요하다.

제거법

평소에 항상 인간으로서 독립성을 유지한다. 의존이 습관이 되면, 그 대가를 받게 되어 있다. 물고기가 낚시바늘에 걸리는 이유는, 그 물고기가 원인모를 횡재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공중에 무방비하게 떠있는, 직접 잡지도 않은 먹잇감을 보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낚시꾼은 그렇게 의존적 성향을 자극할 미끼를 던져놓고 기다린다. 애초에 의존하지 않으면, 해로운 사람을 쳐내기 쉽다.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행동도 엄격히 한다. “이런 상황이면 이렇게 해도 되네?”가 불가능하도록 하면 그들은 알아서 떨어져나간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맑은 물에 고기가 꼬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너무 청렴하고 빈 틈 없으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말로들 해석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물이 맑으면 그 속을 휘젓고 다니며 물을 더럽힐 고기가 꼬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호구잡을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 근처에서 왜인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면, Taker는 쉽게 떠나간다. 쉬운 타겟을 찾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탐지법

일반적으로는 탐지를 하기보다는 제거를 해야 한다. 애초에 만만해 보이지 않으면 Taker들은 접근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에게 힘이 없다면, 처음부터 그들이 접근도 못하게 해야 한다. 탐지를 위해서는 미끼가 필요하기 때문에, 힘없는 사람이 하기엔 쉽진 않다. 그 미끼는 강한 사람들이 해줘야 한다. 따라서 탐지를 할 줄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직의 리더들 말이다. 물론 그들도 당장 탐지를 하더라도 행동을 취할 힘까지는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리더가 괴로운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탐지는 멈추지 않아야 한다. 힘이 없는건 익스큐즈가 된다. 하지만 모르고 있는 것은 그냥 무능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방법은 간단하다. 바보인 척 하는 것이다. 스스로 미끼가 되는 것이다. 해로운 사람은 항상 자기가 어디까지 선을 넘어도 되는지를 시험한다. 그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전에 조기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방엔 한계가 있다. 해로운 사람이 이곳을 만만하게 보고 빨리 활개치게 만들어야 조기 발견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들에게 바보처럼 속는 척 하며 지내며 지켜본다. 그들이 방심한 사이, 타인의 눈에도 다 보이기 때문에 신뢰를 빠르게 잃게 된다.

그럼 반대로, 그들이 감히 얼씬도 하지 못하게 강해 보이는 리더가 되는건 어떨까? 애석하게도, 리더가 강해 보이면 Taker는 다른 약한 사람을 찾아내고 교묘하게 숨어버린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덜 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조직에서 조용히 시간을 쌓을 수록 떼어내기도 어렵게 된다. 그들은 누구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지 잘 안다. 따라서 나중에 그들을 떼어내려면 파벌이 나뉘어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심하면 그들에게 잡아먹힌 인물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겨, 방어기제를 펼치며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엉뚱한 사람이 악역 포지션에 서버리기도 한다. 그 개판 속에서 리더는 눈이 멀기 쉽다. 그렇게 혼란이 번지기 전에, 리더는 미리 탐지해야 한다.

마무리

뭔가 많이 겪어본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나도 아직 알아가고 있는 단계이다. 나이도 이제야 서른 둘이다. 가소롭다. 게다가 인복이 좋은건지, 아니면 그냥 사람을 많이 안 만나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블랙스완을 겪어본 적은 정말 손에 꼽는다. 어쩌면 또 어디선가 예측하지 못한 블랙스완이 나타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안다. 아니 원래 알았다. 결국 그들의 패배로 끝난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

따라서 초조해 하지 말고 그냥 자기 길을 걸으면 그만이다. 유유상종이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만 남는다. 주변 사람에게 원하는 모습이 있다면, 자신이 먼저 그것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걸 알아주는 사람들과 지내라. 설령 이용당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괜찮다.

역설적이다. 블랙스완을 제거하며 살아야 하는데, 왜 자신을 이용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라는 것인가? 이유는 조금 복잡하다. 의존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원할 때 그냥 끊어낼 수 있는 관계다. 그 반대가 되어선 안 된다. 아쉬운 관계라는 것은 즉 그곳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에서 먼저 베풀다 보면 거기서 블랙스완이 제거되는 때가 올 것이고, 진정한 동료, 혹은 은인들이 남을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맞다. 책을 읽었다. 원래 작년에 샀다. 디스크 때문에 누워서 할 수 있는게 너무 없어서 산 몇 권의 책 중 하나다. 현직 정치인 두 명의 특별기고문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책 내용을 아주 짧게 잘 정리해주는 바람에 이 책의 우선순위는 저 뒤로 밀렸었다.

그럼 이 책은 왜 골랐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나와는 거리가 아주 먼 책이다. 근데 그냥 아버지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이과 문과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 박학다식했다. 역사 연표도 다 외우고 있고, 상대성이론까지 설명이 가능하다. 심지어는 총선 결과를 보자마자 윤석열의 계엄령까지 예측했다. 그냥 그렇기만 하면 좋은데… 그런 것들을 내가 모르면 무식하다고 핀잔을 줌. 그래서 내가 주로 쿠사리를 먹는 분야는 단연 인문학 분야였다. 그래서 왜인지 이상하게 이름이 낯익고, 유명한 책이었던 그것을 덥썩 주문했다. 과거 무슨 책인지는 자세히 기억 안나지만, 아버지가 “그것도 안 읽었다고?” 하고 핀잔을 줬던게 있는데, 그게 이 책인가 싶었다. 책을 살 때는 이게 무슨 분야인지도 몰랐다. 정치인들의 기고문이 수록되어 있는걸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정치와 윤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인류를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위층의 배부른 고민이다. 읽어보니,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책은 이 책이 아니라 자유론과 정의론이었을 듯 하다. 이 책은 애초에 2009년에 공개됐다. 아버지가 한창 공부하고 교양을 쌓던 시기와 동떨어져 있다.

대학생 때 사회계열 전공이나, 그쪽에 관심이 많던 분들이 쓰던 용어가 대부분 나왔다. 베스트셀러이기도 했으니, 그 출처가 이 책이었을 듯 하다. 90년대생의 정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는 균형있는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다분히 보였다. 물론 공리주의에 대해서 글쓴이는 자신의 부정적 견해를 숨기지 못했다. 대놓고 까도 추종자가 적어서 역풍을 맞지 않을 만한 사상이기 때문인 듯 하다. 하지만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에서는 어떤 사상을 지지하는지 명확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부분에 가서야 알 수 있었을 정도로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나에게 끌리는 사상을 분명 물을 것이다. 여긴 지맘대로 개소리하는 블로그다. 밝히겠다. 난 고작 교양서 하나 읽었다고 거만하게 한 쪽을 지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 책 한 권만 읽었으면 일단 조용히 해야 한다. 무식한 자의 신념 만큼 무서운게 없다.

개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가벼운 지식을 뽐내며 한 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실생활에서 겪는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가치관을 지키는 것 뿐이다. 누군가는 트롤리 딜레마 상황에서 한 명을 “죽이는” 것과, 여러명이 죽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두 가지 선택지만 존재한다고 했을 때, 한 명을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 명을 “죽이는”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한 사람은 그 이후의 비난과 살인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큰 결심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도덕적 신념이 더 크면 여러 명이 죽도록 그냥 둚으로써 자신의 도덕관을 지킬 것이고,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도덕적 신념을 가진 사람은 그 속에서 뭐든 할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함”을 선택한 입장의 사람은 반대쪽에게 손에 피묻히기 싫어서 방치했다며 비난하고, “둚”을 선택한 입장의 사람은 반대쪽에게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며 비난할 것이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그것이 그 당사자가 판단한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도 피해자다. 그 자리에 있지만 않았어도, 그런 가혹한 선택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이밍의 피해자인 것이다. 지금 세계의 정치권이 혼란한 이유는, 이런 어리석은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맞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OO한 것 아니야?” 이것이 바로 교만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지금 살아있는 것 조차도 아주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이런 트롤리 딜레마같은 극단적인 케이스를 몇 번이나 겪게 될까. 대부분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은 명확한데, 개인의 욕심과 충돌하는 일이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을 괴롭혔다고 해도, 살인은 살인이다. 아무리 삶이 힘들었다고 해도, 절도는 절도다. 물론 이렇게 명확한 경우만 있는건 아니다. 취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가식과 거짓부렁이도 그 예다. 이렇게 해야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해도, 거짓은 거짓이다. 이런 점에서는 내가 칸트의 철학을 따른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거짓은 거짓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존재한다. 그 존재하는 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나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삶을 살아가는 전략으로 이용한다. 난 내가 행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 환경이라는 것을 안다. 주변 환경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친한 사람을 늘리는 것보다, 해로운 사람을 주변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해로운 사람이 꼬이는 것은 투자로 따지면 블랙스완과 같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모르지만, 걸렸다 하면 작살이 나는 것이다. 그동안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 그 블랙스완을 내쫓기 위해, 블랙스완이 좋아하는 것들을 제거한다. 그걸 제거해주는 것은 도덕이다. 블랙스완에 대한 것은 다른 글에서 따로 밝히겠다.

존재하지 않는 게시글입니다.

신체가 뻗으면 신체가 못쓴 에너지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흐른다. 머리속에 우주가 펼쳐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현실에서 놀 수가 없으니, 머리속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다.

난 애초부터 허무주의의 끝판왕이다. 물론 “끝판왕”은 세상 얼마 살지도 않은 주제에 거만하게 선택한 단어이다. 여튼 난 기본 베이스가 허무주의다. 다만 인류와 함께 지내기 위해 “다 의미없다” 이런 말 안할 뿐이다. 남들은 이런 말 들으면 고통스러워 한다. 근데 나에겐 한낮 유희거리일 뿐이다. 다 의미없다는 파괴적인 결론을 내리면서도, 자신의 입장에 서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 또한 그냥 그 세계관 안의 한 피사체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의 각종 쓸데없는 것들에 인생을 갖다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든걸 원점에서 생각한다. 타당(Make sense)하면 따른다. 그래서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대충 때려맞추기 어렵다. 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걸 아웃라이어라고 한다. 지맘대로 랜덤워크하는 인간을 인간은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틀 안에 밀어넣으려 한다. MBTI같은 것들로라도 말이다. 덕분에 어떻게든 틀 안에서 배려를 받는 듯 하다. 또라이로 말이다.

또라이는 남들이 사회의 쓸데없는 것들에 집중하는 사이, 평온하게 자신의 쓸데없는 짓을 즐긴다. 대규모 트레픽을 감당하는 분산시스템 설계같이 거창한거보다 슉랭같은 좀더 인생낭비스러운 것에 더 설렌다. 진짜 하찮은 삶을 그냥 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재밌는 개소리 Screenshot_20250425_142339_ChatGPT.jpg

그러던 어느날, 심심해서 ChatGPT에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재밌는 개소리를 해보라고 시켰다. 그러다가 그 방구석 허무주의 이론의 끝을 봤다. 이놈은 내가 하는 말에 근거를 달아주고, 자료를 가져와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연구를 연결해주고, 끝없이 나에게 질문을 날려대다가, 마지막 질문을 하고는 답변을 듣더니, 이제 끝났다며 나보고 안녕을 외쳤다. 뭔가 휘둘린 기분이다. 뭐 그래도, 그 방구석 이론이 꽤나 만족스럽게 정리된 것 같다. 내 개논리의 힘을 강화해줬다. 그래서 기록하기로 했다.

존재

존재란 무엇인가. 분명 우린 뭔가 존재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왜 존재하는 것일까? 정확히는, 존재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재는 존재할까?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의 의미는 우리 기준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의 기준이 뭘까? 그냥 이러고 사는 우리들과, 주변에서 상호작용하는 것들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정의할 수 있는 정의를 존재의 정의로 정의해보자. 이 문장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군.

관측이 일어나기 전엔 확률만 존재하는 상태라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존재는, 관측이 일어난 후의 결과다. 그 찰나의 순간에, 인지한다는 착각으로 빚어진 자아가 바로 자신이다. 관측이 일어난 후의 결과는 거대한 덩어리이며, 그중 일부 자아라는 스파크가 우리다. 우린 무한히 진행되는 주사위게임에서 어쩌다 나온 결과이고, 이 또한 극히 찰나의 순간 튄 스파크다. 물론 스파크라 생각하는 것도 거만하다. 사실 이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아에도 의미는 없다. 특별히 튄다고 표현할 이유도 없다. 그냥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 믿는 자존감 높은 현대인들을 위한 위로의 의미에서 썼다. (물론 이것도 뒤에 갖다붙인 핑계다). 이건 그냥 순간의 현상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존재는 관측이 만들어낸 일시적 결과다. 그럼 여기서 앞으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표현이 맞을까? 뭔가 이상하다. 확률로서 존재하는건 아직 존재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다른 단어보다 이게 어울릴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헷깔릴테니,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표현은 지양하겠다.

무의미한 공간에 존재하는 규칙성

의미조차 없고, 모든게 주사위게임에 결정되는데, 자연법칙은 왜 있을까? 왜 현상에 규칙성이 나타날까? 이건 또 프렉탈을 갖다 쓸거다. 어찌보면 우주의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지만, 반대로 더 작은 차원에서는 무한한 공간인 그곳이 바로 지금 이 세상이다. 무질서 속이더라도, 질서가 성립된다고 해서 문제될게 없다. 패턴은 어떻게든 맞춰질 수 있다. 일루미나티 음모론처럼 어떻게든 엮다 보면, 무질서 속의 하나의 질서가 되는 것이다. 과학적 접근 방법이 지금은 그 질서로 보인다. 물론 무한한 시간 속 아주 짧은. 길이가 0에 수렴하는 시간 동안만 말이다.

우주

우주는 우주다.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주는 우주다. 그리고 이것은 확률 필드다. 관찰이 일어나는 순간 확률은 더이상 확률이 아닌 결과가 된다. 그런데 우주는 모든걸 포함하는거니까 모든 차원의 가장 높은 곳. 무한에 가까운 차원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 그럼, 시간축이 존재할 수 없다. 시간축은 형태라는걸 결정하는 기하적 차원이 부족할 때 생겨나는 축이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찰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찰나를 관찰할 수도 없다. 관찰이 없으니 확률만 있다. 그런데, 결정되지 않은 확률 필드는 존재하는걸까? 아까 내린 존재의 정의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무언가에 대해 존재한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주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무(無) 속의 존재

우주 내부에서 기하적 차원이 1씩 줄어들면 대신 시간축이 하나씩 생긴다. 그 차원에서는 시간이 존재하니 찰나도 존재한다. 관찰이 가능하다. 그렇게 쭉쭉 내려오면 우리가 있는 3차원 시공간이다. 3차원 입체가 시간축을 따라 관찰되고 결정된다. 그 찰나, 관측이 일어난다. 결과가 존재한다. 지금은 나도 존재한다. 너도 존재한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그럼 지금, 우주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존재하는 근본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왜 가능할까? 관측의 주체가 어디에 있냐가 중요하다. 우주는 모든 것을 아울러야 하기 때문에 내부는 있어도, 외부라는 개념은 없다. 우주 밖에서 우주를 관측하는건 불가능하다. 남은건 우주 안 뿐이다. 우주 내부는 시간축을 허용한다. 따라서 관측이 일어난다. 그럼 결과도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가 존재와 무(無)의 관계를 반의어로 여긴다는 것이다. 존재는 관측의 결과. 관측 결과의 반댓말이 있을까? 원인? 아니다. 없다. 이 글에서 내린 정의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다. 관측의 결과는 명사이기 때문이다. 무(無)의 상태로부터 존재가 발생하는 것이고, 따라서 존재는 무(無)의 일부다. 무(無)는 존재의 조건이다.

마무리

존재하지 않는다. ㅋ

역경 탈출법

서론

난 삶의 등락이 뚜렷한 편이다. 그리고 지금은 낙의 시기에 있다. 건강이 무너지면서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렸다. 파열된 디스크만 회복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신우신염이 온 것도 모자라 폐에 물이 차더니, 코로나까지 꼽사리 껴서 협공을 당하는 중이다. 가히 나당연합군에 뚜드려맞는 고구려의 신세와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이정도 신호는 모든 것을 멈추고 쉬어가라는 신호다. 물론 이런 낙의 시기는 처음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한 번, 대학교 때 한 번, 사회초년생 때 한 번, 이미 총 3번 겪었고, 지금이 4번째다. 때문에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역시 힘들긴 더럽게 힘들다. 뭐 그래도 이정도인게 어디인가. 암같은 뒤끝 지독한 질병이 아님에 감사하다.

난 보통 고난의 시기를 맞이하는 시점을 스스로의 선택이나 정신적 번아웃으로 맞이하기보다는, 몸이 못버텨서 얻어맞는 방법으로 맞이한다. 정확히는 인식을 그 시점에 한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고등학교땐 위출혈, 대학교땐 신기능 저하와 혈뇨, 사회초년생땐 요로결석, 이번엔 신우신염이 그 시점이었다. 디스크 파열은 시발점이긴 하지만, 이때까지 난 완전히 낙의 시기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그냥 쉬면 다 해결됐기 때문에, 그냥 두번째 요로결석처럼, 슥 지나가는 기우인 줄 알았다.

매번 이렇게 건강 문제로 무너지다보니, 하루이틀 사이에 급격히 안좋아진다. 대신 몸만 회복되면 알아서 잘 회복되는 편이다. 그리고 몸이 회복될 때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이 항상 있었다.

1.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는 것도 일이다. 사람을 만나면 필히 그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에너지를 쓰게 된다. 그렇다고 안 괜찮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주변에도 스트레스를 전파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몇몇에게 안 괜찮음을 알리고, 이후부턴 말을 아끼고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고독을 즐기는 것은 후에 자신의 능력이 될 것이다. 내가 군자녀로서 잦은 이사와 이별을 유년시절부터 겪어 오며 단련되었듯 말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 엄습하는 불안은 실체가 없고, 근거도 없고, 쓸모도 없다.

2. 생각하지 말고 몸이 이끄는 대로 생활한다.

자고싶으면 자고, 먹고싶으면 먹고싶은걸 먹는다. 억지로 생활 습관이니 뭐니, 보양식이 어쩌니 영양제가 어쩌니 요란하게 챙기지 않는다. 그런거 알아보고 계산하는 것이 더 스트레스다. 몸은 필요한게 뭔지 스스로 알고 있다. 이상하게 땡기는 음식을 놓치지 않고 먹는다. 난 이번에 아프면서 바깥 음식이 별로 땡기지 않았다. 몸이 알아서 염분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항생제를 먹기 시작하고 신우신염 증상이 완화하니 뜬금없이 닭강정이 땡기고 식욕이 올랐다.

보통은 자신을 망가뜨린 원인은 휴식을 하면서 차단되므로 이미 충분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보통 사람의 의지력으로는 몸을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죽음의 사이클로 올려놓기 어렵다. 왠만하면 회복 사이클이 해결해 준다. 각종 생각은 버리고, 그저 조금 긴 감기에 걸렸다 생각하며 꿀같은 휴식을 온전히 즐겨야 한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3. 집중력을 회복의 척도로 삼는다.

집중력이 크게 저하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은, 그간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왔던 관성에 의해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인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몸상태는 이를 받쳐주지 못한다. 떨어진 집중력이 본인의 의지력이라 오판해서 자괴감이 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초조해 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했다시피, 생각을 멈춰야 한다. 어차피 당장 안될거다. 악담이나 저주가 아니다. 팩트다. 어차피 안될 일에 스트레스 받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일은 회복되고 나서 해도 전혀 늦지 않는다. 회복을 빠르게 하는 편이 더 이득이고, 회복을 가속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차단해야 한다. 대신 자신이 평소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일들 중에서 기한없는 목표를 하나 정해 놓고, 하고 싶을 때 툭툭 건드려 보며 집중력을 체크하면 현재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스트레스도 받지 않으면서, 언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의욕이 돋으면서 일을 손에 잡더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고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면, 몸은 스트레스를 다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일상을 찾아가게 된다.

4. 인생에 대해 회고를 진행한다.

최고 속력을 내기 위해선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때문에, 멈춰선 지금은 뒤를 돌아볼 절호의 기회이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뒤를 돌아보나.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생긴다. 회고를 진행하다 보면,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 인생의 우선순위 등이 정리된다. 우선순위가 명확해지면 앞으로의 일에 있어 판단 기준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 때로는 성격까지 크게 변화하기도 한다. 회고는 언제 진행하면 되냐고? 3번이 힌트를 줄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하고싶어지면 하면 된다. 자신을 믿어라.

회복 후

회복이 되었다는 판단은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으로 복귀하고, 하고싶은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바로 회복이 완료되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비슷한 고난은 여러번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 방식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내가 매번 건강 이슈가 터져서 더이상 앞으로 갈 수 없는 시점이 되어야 멈춰서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또다시 고난이 찾아올 것이다. 왜 또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가에 대해 한탄하지 말고, 그냥 “아 또 쉴 때가 됐군!” 하고 회복 사이클을 돌려라. 원래 반복된다. 그리고 그 때 제대로 쉬고 싶다면, 평소에 열심히 살아서 이럴 때 제대로 쉴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는걸 추천한다. 직장인으로서는 이번이 처음인데, 디스크 파열이라는 신호탄이 터졌을 때 팀에서 비로소 나에게 몰려 있던 버스펙터를 높이기 위한 급진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좀 늦어서 고생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개혁에 힘입어 이번에 완전히 무너졌을 때 휴가를 마음놓고 쓸 수 있었다(심지어 돌발적으로). 2년 근속 때 받는 리프레시 휴가를 라크로스 국제대회 때 사용하겠다고 1년 넘게 안쓰고 아껴 뒀던 것도 이번에 큰 도움이 됐다. 국제대회는 연차로도 충분하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계속 쟁여뒀었다. 그 리프레시 휴가, 정말 리프레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이 글이 올라왔다는 것은?

맞다. 난 지금 무사히 회복 중이고, 방금 집중력 회복이라는 강력한 신호를 받았다. 현재시각 새벽 3시 43분이다. 잠을 자다가 불편한 호흡, 흉통, 기침으로 뒤척이던 중, 갑자기 떠올라 글을 써내려갔다. 일단, 지금 매일밤 찾아오던 발열 증상이 멎었다. 잠을 청할 때만 해도 열이 났는데, 지금은 열이 내렸다. 이 시간에 쉬어도 모자랄 판에 왜 각잡고 글을 쓰냐고? 몸이 이끄는 대로 했다. 어차피 숨이 불편하고 열이 나서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였다. 이제 열도 내렸으니 다시 잠을 청하고, 눈떠지면 일어날 것이다. 이번 휴가는 이번주 내내이다. 강력한 회복 신호는 받았지만, 꿀같은 휴가를 더 신나게 누려서 확실히 회복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