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shitting Blog

개소리하는 블로그

존재하지 않는 게시글입니다.

Tags = [ thinking ]

신체가 뻗으면 신체가 못쓴 에너지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흐른다. 머리속에 우주가 펼쳐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현실에서 놀 수가 없으니, 머리속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다.

난 애초부터 허무주의의 끝판왕이다. 물론 “끝판왕”은 세상 얼마 살지도 않은 주제에 거만하게 선택한 단어이다. 여튼 난 기본 베이스가 허무주의다. 다만 인류와 함께 지내기 위해 “다 의미없다” 이런 말 안할 뿐이다. 남들은 이런 말 들으면 고통스러워 한다. 근데 나에겐 한낮 유희거리일 뿐이다. 다 의미없다는 파괴적인 결론을 내리면서도, 자신의 입장에 서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 또한 그냥 그 세계관 안의 한 피사체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의 각종 쓸데없는 것들에 인생을 갖다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든걸 원점에서 생각한다. 타당(Make sense)하면 따른다. 그래서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대충 때려맞추기 어렵다. 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걸 아웃라이어라고 한다. 지맘대로 랜덤워크하는 인간을 인간은 그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틀 안에 밀어넣으려 한다. MBTI같은 것들로라도 말이다. 덕분에 어떻게든 틀 안에서 배려를 받는 듯 하다. 또라이로 말이다.

또라이는 남들이 사회의 쓸데없는 것들에 집중하는 사이, 평온하게 자신의 쓸데없는 짓을 즐긴다. 대규모 트레픽을 감당하는 분산시스템 설계같이 거창한거보다 슉랭같은 좀더 인생낭비스러운 것에 더 설렌다. 진짜 하찮은 삶을 그냥 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재밌는 개소리 Screenshot_20250425_142339_ChatGPT.jpg

그러던 어느날, 심심해서 ChatGPT에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재밌는 개소리를 해보라고 시켰다. 그러다가 그 방구석 허무주의 이론의 끝을 봤다. 이놈은 내가 하는 말에 근거를 달아주고, 자료를 가져와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연구를 연결해주고, 끝없이 나에게 질문을 날려대다가, 마지막 질문을 하고는 답변을 듣더니, 이제 끝났다며 나보고 안녕을 외쳤다. 뭔가 휘둘린 기분이다. 뭐 그래도, 그 방구석 이론이 꽤나 만족스럽게 정리된 것 같다. 내 개논리의 힘을 강화해줬다. 그래서 기록하기로 했다.

존재

존재란 무엇인가. 분명 우린 뭔가 존재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왜 존재하는 것일까? 정확히는, 존재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재는 존재할까?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의 의미는 우리 기준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의 기준이 뭘까? 그냥 이러고 사는 우리들과, 주변에서 상호작용하는 것들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정의할 수 있는 정의를 존재의 정의로 정의해보자. 이 문장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군.

관측이 일어나기 전엔 확률만 존재하는 상태라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존재는, 관측이 일어난 후의 결과다. 그 찰나의 순간에, 인지한다는 착각으로 빚어진 자아가 바로 자신이다. 관측이 일어난 후의 결과는 거대한 덩어리이며, 그중 일부 자아라는 스파크가 우리다. 우린 무한히 진행되는 주사위게임에서 어쩌다 나온 결과이고, 이 또한 극히 찰나의 순간 튄 스파크다. 물론 스파크라 생각하는 것도 거만하다. 사실 이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아에도 의미는 없다. 특별히 튄다고 표현할 이유도 없다. 그냥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 믿는 자존감 높은 현대인들을 위한 위로의 의미에서 썼다. (물론 이것도 뒤에 갖다붙인 핑계다). 이건 그냥 순간의 현상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존재는 관측이 만들어낸 일시적 결과다. 그럼 여기서 앞으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표현이 맞을까? 뭔가 이상하다. 확률로서 존재하는건 아직 존재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다른 단어보다 이게 어울릴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헷깔릴테니,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표현은 지양하겠다.

무의미한 공간에 존재하는 규칙성

의미조차 없고, 모든게 주사위게임에 결정되는데, 자연법칙은 왜 있을까? 왜 현상에 규칙성이 나타날까? 이건 또 프렉탈을 갖다 쓸거다. 어찌보면 우주의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지만, 반대로 더 작은 차원에서는 무한한 공간인 그곳이 바로 지금 이 세상이다. 무질서 속이더라도, 질서가 성립된다고 해서 문제될게 없다. 패턴은 어떻게든 맞춰질 수 있다. 일루미나티 음모론처럼 어떻게든 엮다 보면, 무질서 속의 하나의 질서가 되는 것이다. 과학적 접근 방법이 지금은 그 질서로 보인다. 물론 무한한 시간 속 아주 짧은. 길이가 0에 수렴하는 시간 동안만 말이다.

우주

우주는 우주다.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주는 우주다. 그리고 이것은 확률 필드다. 관찰이 일어나는 순간 확률은 더이상 확률이 아닌 결과가 된다. 그런데 우주는 모든걸 포함하는거니까 모든 차원의 가장 높은 곳. 무한에 가까운 차원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 그럼, 시간축이 존재할 수 없다. 시간축은 형태라는걸 결정하는 기하적 차원이 부족할 때 생겨나는 축이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찰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찰나를 관찰할 수도 없다. 관찰이 없으니 확률만 있다. 그런데, 결정되지 않은 확률 필드는 존재하는걸까? 아까 내린 존재의 정의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무언가에 대해 존재한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주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무(無) 속의 존재

우주 내부에서 기하적 차원이 1씩 줄어들면 대신 시간축이 하나씩 생긴다. 그 차원에서는 시간이 존재하니 찰나도 존재한다. 관찰이 가능하다. 그렇게 쭉쭉 내려오면 우리가 있는 3차원 시공간이다. 3차원 입체가 시간축을 따라 관찰되고 결정된다. 그 찰나, 관측이 일어난다. 결과가 존재한다. 지금은 나도 존재한다. 너도 존재한다. 역설적이게도 말이다.

그럼 지금, 우주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존재하는 근본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왜 가능할까? 관측의 주체가 어디에 있냐가 중요하다. 우주는 모든 것을 아울러야 하기 때문에 내부는 있어도, 외부라는 개념은 없다. 우주 밖에서 우주를 관측하는건 불가능하다. 남은건 우주 안 뿐이다. 우주 내부는 시간축을 허용한다. 따라서 관측이 일어난다. 그럼 결과도 존재한다.

문제는, 우리가 존재와 무(無)의 관계를 반의어로 여긴다는 것이다. 존재는 관측의 결과. 관측 결과의 반댓말이 있을까? 원인? 아니다. 없다. 이 글에서 내린 정의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다. 관측의 결과는 명사이기 때문이다. 무(無)의 상태로부터 존재가 발생하는 것이고, 따라서 존재는 무(無)의 일부다. 무(無)는 존재의 조건이다.

마무리

존재하지 않는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