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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 2. 이별 전문가

Tags = [ memoir ]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다. 온 가족이 가장을 따라 함께하던 과거, 군인 가정은 한가지 특수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바로 잦은 이사다. 1~2년 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표준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은 단지 곧 지나가고 사라질 무언가였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유년시절 남은 기억엔 인천에서 지내던 동안 내가 매일같이 집에 찾아갔던, 항상 자신이 하던 게임을 구경시켜주던 사람과, 평택에 지내는 동안 집에 매일같이 방문하며 놀았던 친구의 어렴풋한 얼굴 특징과 이름 정도만 있다. 하지만 이사로 인해 결국 그들과도 이별해야 했다.

유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초등학교 입학 이후부터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사실 그냥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부모님께 뒤늦게 들은 사실이지만, 난 아기 때 자폐증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폐증을 진단받진 않았지만, 어느정도 가까운 스펙트럼에 있긴 한가보다. 오히려 그런 성격이 이런 생활을 무덤덤하게 보내는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난 사람보다 주변의 사물이나 돌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혼자 잘놀았다. 곤충채집을 하거나, 집 근처 개울에서 올챙이나 도롱뇽을 잡기도 하고, 식초와 소다를 구해서 필름통 폭탄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주말이면 가족끼리 근처의 강으로 가서 수영을 하고 피래미와 다슬기를 잡으며 놀았다. 그렇다고 완전 폐쇄적이진 않았다. 가끔 놀이터로 가면 그곳에 있는 아이들과 서로 이름도 모른 채 함께 놀았다. 노는 방법도 특이했다. 부서진 나무 시소를 다같이 낑낑대며 뜯어와 그네에 연결해서 4-5명이 동시에 그네를 타기도 했다. 당장 내일도 헤어질 수 있는 우리들은 굳이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 서로를 알아가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재밌는 무언가를 하는데 더 집중했다.

그래도 다른 군인가정과는 다르게 우리 가족은 계룡이라는 군인도시에서 장장 6년 정도를 지냈다. 오래 지내니 한 곳에 정착되어 정서적 안정감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때도 옮겨다니는 삶을 살았을 터. 우리는 학교에서 만나면 함께 놀기는 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어차피 이 군인도시에서는 또 학기가 지나면 누군가 전학을 가고, 학년이 넘어가면 무더기로 인원이 바껴서 누가 가고 누가 왔는지 조차 안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년 아버지들의 거처가 결정되는 발령철에 자신들의 이후 행선지를 밝히며 이별을 고하는게 그곳의 문화였다. 대신 이곳은 한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왕따가 생길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적당히 같이 놀다가, 헤어질 땐 쿨하게 헤어졌다. 중간 전학생은 매년 2-3명씩 있었기 때문에 금방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에 아버지가 제대하셨고, 새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데 아주 오래 걸리게 되었다. 이사를 간 이후, 몇년동안은 매년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동급생 이름을 다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