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shitting Blog

개소리하는 블로그

[ memoir ]

회고록 - 1. 서론

난 요즘 건강 문제로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집중력을 회복한 지금, 살아온 길을 한 번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아주 파란만장하지는 않지만,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 왔다. 이동이 잦아서 여러 세상들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다르다.

전 여자라크로스 대표팀 감독님은 나에게 한 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난 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그럴 만 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냥 “저도요” 하고 말았다. 난 할 만한 말이 많지 않다보니, 소위 “개소리"를 많이 한다. 영양가 없는, 장난에 가까운, 뜻없고 과장된, 실없는 헛소리들 말이다.

이동이 잦은 삶을 살았고, 어디를 가도 이방인인 삶이었다. 특유의 폐쇄적인 성격은, 그 여러 세계들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찰케 하였다. 삶의 흐름이 다르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잘 말하지 않게 되었다. 남들도 다들 이미 많은 일들을 겪었고, 자신들의 세계관이 존재한다. 게다가 조금은 어두운 이야기도 섞여 있기 때문에, 밝은 친구들에게 그런 세상 이야기를 하기도 좀 부담스럽다. 딱히 알아도 도움이 안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내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주구장창 길게 늘어놓는 것은 타인에게 피로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회고를 할 땐 누군가에게 말로 털기보다는 혼자서 글을 쓴다. 글을 쓰면 생각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난 지금도 초등학교 4학년 중간고사 때 사회 과목 시험에서 주관식 문항의 답인 등고선이 기억나지 않아서 고민 끝에 고등선이라는 답을 제출한걸 기억하고 있다. 아 물론, 분했기 때문에 기억하는거다. 걷지도 못하던 아기 때 어머니가 나를 어떤 자세로 업었는지도 기억한다. 물론, 불편하게 업어서 기억하는거다. 초등학교 시절에 놀러 다니던 강가의 식당 이름도 기억한다. 솔밭가든, 신장가든. 솔밭가든쪽이 수심이 더 깊어서 놀기 좋았다. 장기기억에 남기만 하면 꽤나 생생하게 오래 기억하는 편이다. 대학교 교양 심리학 과제로 인생곡선을 그려오라고 했는데, 64개의 사건에 대한 곡선을 그려갔다.

기억하는게 많은 바람에, 글을 쓰면 많이 길어지는 편이다. 난 항상 글을 쭉쭉 써내려간 후, 요약하고 지우고 재배치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다행히도 대학교 글쓰기 수업에서 개요를 작성해서 뼈대를 세우고 글을 쓰는 등의 잡기술을 얻어서, 이런 식으로 삽질하는 시간은 좀 줄어들었다.

이번엔 회고를 공개하게 되었다. 이 블로그는 배설하듯 글을 쓰는 공간이다. 남의 피드를 차지해서 강제적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그런 플랫폼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그런 공간에 걸맞게,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갈 것이다. 사실, 이렇게 써놓고 실제로는 고쳐써야 했다. 처음엔 쭉 이어서 썼다가, 너무 길어서 10편으로 나눴다.

회고록 - 2. 이별 전문가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다. 온 가족이 가장을 따라 함께하던 과거, 군인 가정은 한가지 특수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바로 잦은 이사다. 1~2년 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표준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은 단지 곧 지나가고 사라질 무언가였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유년시절 남은 기억엔 인천에서 지내던 동안 내가 매일같이 집에 찾아갔던, 항상 자신이 하던 게임을 구경시켜주던 사람과, 평택에 지내는 동안 집에 매일같이 방문하며 놀았던 친구의 어렴풋한 얼굴 특징과 이름 정도만 있다. 하지만 이사로 인해 결국 그들과도 이별해야 했다.

유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초등학교 입학 이후부터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사실 그냥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부모님께 뒤늦게 들은 사실이지만, 난 아기 때 자폐증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폐증을 진단받진 않았지만, 어느정도 가까운 스펙트럼에 있긴 한가보다. 오히려 그런 성격이 이런 생활을 무덤덤하게 보내는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난 사람보다 주변의 사물이나 돌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혼자 잘놀았다. 곤충채집을 하거나, 집 근처 개울에서 올챙이나 도롱뇽을 잡기도 하고, 식초와 소다를 구해서 필름통 폭탄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주말이면 가족끼리 근처의 강으로 가서 수영을 하고 피래미와 다슬기를 잡으며 놀았다. 그렇다고 완전 폐쇄적이진 않았다. 가끔 놀이터로 가면 그곳에 있는 아이들과 서로 이름도 모른 채 함께 놀았다. 노는 방법도 특이했다. 부서진 나무 시소를 다같이 낑낑대며 뜯어와 그네에 연결해서 4-5명이 동시에 그네를 타기도 했다. 당장 내일도 헤어질 수 있는 우리들은 굳이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 서로를 알아가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재밌는 무언가를 하는데 더 집중했다.

그래도 다른 군인가정과는 다르게 우리 가족은 계룡이라는 군인도시에서 장장 6년 정도를 지냈다. 오래 지내니 한 곳에 정착되어 정서적 안정감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때도 옮겨다니는 삶을 살았을 터. 우리는 학교에서 만나면 함께 놀기는 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어차피 이 군인도시에서는 또 학기가 지나면 누군가 전학을 가고, 학년이 넘어가면 무더기로 인원이 바껴서 누가 가고 누가 왔는지 조차 안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년 아버지들의 거처가 결정되는 발령철에 자신들의 이후 행선지를 밝히며 이별을 고하는게 그곳의 문화였다. 대신 이곳은 한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왕따가 생길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적당히 같이 놀다가, 헤어질 땐 쿨하게 헤어졌다. 중간 전학생은 매년 2-3명씩 있었기 때문에 금방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에 아버지가 제대하셨고, 새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데 아주 오래 걸리게 되었다. 이사를 간 이후, 몇년동안은 매년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동급생 이름을 다 알지 못했다.

회고록 - 3. 가난의 표현형

부산으로 이사갔다. 부산은 처음이 아니었다. 방학 때 종종 부산 용호동의 외할머니 댁에서 한 달 정도씩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에 실제로 다닌건 처음이었다. 호전적인 사투리를 제외하면 별다른 특징을 느낄 수 없었다. 고작 한 학기를 다니고 졸업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민간 가정으로서의 학교 생활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내가 있던 곳은 공단 근처였다. 부촌은 아니었다. 아버지들이 모두 똑같은 군인이었던 계룡과는 달리, 그 안에서는 빈부격차가 있었다. 엇나가는 학생들도 많고, 사방이 도로에 인접한 학교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선도부가 할 일이 많았다. 난 입학 당시 사춘기를 크게 겪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순둥했고, 애들한테도 관심이 없어서 담임선생님은 나를 선도부로 배정했다.

아침엔 요일 별 당번으로 일찍 등교해서 복장 및 지각단속 등을 하고, 점심엔 외출을 관리하고, 담을 넘거나 달려서 교문을 탈출하려는 무단외출 시도를 단속했다. 난 설명을 듣고 학교의 헌병이라고 이해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신참은 눈치없이 3학년 양아치를 잡고 이름을 적었다. 밥을 함께 먹는 친구조차 예외는 없었다. 장교가 온다거나, 매일 보는 이가 온다고 해서 신분증 검사를 안하는 헌병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물론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은 사실이지만, 위험한 일이 없진 않았다. 한 번은 내가 급한 용무로 복도를 뛰어가고 있는데 어떤 학생이 목에 커터칼을 들이댄 적이 있었다. 손이 알아서 칼을 쳐서 떨궈버렸고, 다리는 달리던 그대로 달려나가서 그 학생이 누군지도 못보고 사건은 일단락 됐다. 그래도 그런 사건이 한 번 지나가고 나니, 이후 딱히 나를 건드는 사람은 없어서 평화롭게 다녔다. 나에게 소매치기를 시도하는 양아치 후배와 눈이 마주친 것 정도가 다였다.

난 그냥 중학교에 선도부를 하기 위해 들어간 로봇같았다. 인간 사이의 깊은 교류라는 것을 애초에 몰랐다. 대화는 그 대화로 끝이었다. 그냥 들은 말에 대답하는 것이 내 대화법이었다. 사실 왜 이런걸 물어보는지도 이해 못했다. 매일 밥을 함께 먹던 친구들의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좀 미안하다. 난 친구들보다 그날의 수업, 선도부 활동, 선생님이 시키는 일 등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이런 점 때문에 선생님들은 나를 신뢰했고, 나도 모르는 권력이 나에게 주어져 있었다.

전학을 온 친구가 나에게로 찾아왔다. 초등학교 때 의례 그랬던 것처럼 그저 밥을 같이 먹고 대화를 나눴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 친구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친구는 다른 반에 있었기 때문에, 난 점심 시간에 따라오는 그 친구와 함께 밥을 먹고, 하교하면서 교문 밖을 나설 때까지 따라오는 그 친구와 간단한 담소를 나눴다. 그 친구가 무슨 일을 계기로 따돌림을 당했는지, 무슨 일들을 당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본인이 이야기할 리 만무하고, 내가 알아볼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 특별히 생각하거나 느낀 점이 있었다면 분명 포대기에 싸여 어머니 등에 업혔던 기억처럼 뚜렷하게 기억났을텐데 말이다.

내가 평소 함께 밥을 먹던 다른 두 친구는 그 친구가 따라오는걸 막지 않자 나에게 경고했다. 그 친구가 왕따라고. 그렇군.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곧 멀어졌다.

그 왕따 친구는 곧 다시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갔다. 그러면서 나에게 편지를 주고 갔는데, 그제서야 그 친구가 왜 나를 따라다녔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걸어다니는 치외법권같은 것이었다. 내가 평화로운 생활을 누렸던 이유는 내 주변이 평화로웠기 때문이었다. 내 뒤엔 선생님들이 계셨다. 그렇게 어느날 갑자기 뜬금없이 감사 인사를 받으며 익숙한 이별을 했다.

그곳에서 본 가난의 모습은,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는 학생의 모습 따위가 아니었다. 불안 속에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피해 멀어졌던 다른 친구들은 그 친구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그 여파를 받는게 두려워서 마음 한 켠의 불편함을 뒤로 한 채 따돌림에 가담하고 있었다. 나아가서, 약해빠진 청소년일 수록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더 쎈척을 하며 주변을 피곤하게 했다.

회고록 - 4. 중산층의 세상

아버지는 더 좋은 직장을 구해 상경했다. 어머니는 골프에 입문해서 3년 만에 티칭프로 자격증을 땄다. 아무래도 곧 있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준비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또 이사를 갔다. 어머니와 함께 이사를 간 곳은 해운대였다. 맞았다. 맹모삼천지교였다. 어머니는 골프고등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기 시작하더니, 곧 골프연습장을 개업해서 사업을 키워나갔다.

난 해운대에 가서 충격을 받았다. 빈부격차가 뭔지 두 눈으로 확인했다. 해운대는 어느정도 부촌이다. 학생들의 키에서 바로 나타났다. 중학교 때는 내가 큰 키였다. 하지만 해운대에선 특별하지는 않은 키였다. 키 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달랐다. 학생들의 얼굴색은 골랐고, 밝았다. 노는 애들은 있어도, 남을 괴롭히는 무리는 없었다. 왕따도 없었다. 걱정이 없는 그곳의 학생들은 순하고 착했다. 즐겁고 평화로운 고교 생활을 누렸다. 선도부는 그저 등교시간에 차와 학생의 길을 분리하며 학생들의 안전에 집중할 뿐이었다. 복장위반이나 지각은 그저 해프닝이었다. 그걸 핑계삼아 선생님은 툴툴거리며 말을 걸고, 학생은 능글맞게 웃어넘기며 쏙 빠져나갔다. 기자와 작가들은 이런 부촌에 악마가 살길 바라며 각종 자극적인 기사와 작품을 내놓지만, 실제로 악마는 빈자들의 도시에 더 많았다.

부촌에 들어간 로봇에겐 곧 체대에 진학하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하고싶은 것이 생겼다. 그전까지는 마치 관찰자의 시점으로 세상을 살았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어차피 인간은 다 죽는다”는 허무주의적 세계관도 중학교 때까지 봐온 것들에 의해 형성되어 온 것이다. 친구들과 몰려다니지 않는 사람은 그 시기, 나름 배우고 겪은 일들을 종합하며 생각이 참 많았다.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이 스스로 만든 하나의 지옥이라 생각했다. 목표의 탄생은 이 가치관에 약간의 변화를 줬다. “어차피 죽을 인생, 하고싶은거나 실컷 해보자”였다. 흘러다니는 삶은 변하지 않았지만, 변화하는 사이클 사이에 몰입할 것들이 항상 생기게 되었다.

회고록 - 5. 성취

고등학교 3학년에 입시체육을 시작했다. 1학년 때부터 세워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였다. 체육대학 진학을 부모님은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 가고싶다면 SKY 대학을 가라고 했다. 찾아 찾아 입시요강이 나에게 가장 유리한 학교인 연세대를 목표로 뒀다. 화, 목은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월, 수, 금은 학원에 가서 훈련을 하고 학교로 돌아와 텅빈 교실에서 야간자율학습 연장전(야야자라고 불렀다)을 했다.

학원의 강사들은 대부분 육상선수 출신이었다. 다들 국가대표 상비군 이상급이었다. 부산대, 동아대 등, 부산의 대부분 대학교들은 육상 기초실기의 비중이 높았다. 심지어 부산대에는 마의 중거리 달리기가 실기 종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죽도록 뛰어다녔다. 일단 3km를 뛴 다음, 스트레칭을 간단히 하고 20m, 30m, 50m 스프린트를 각각 5-3-2회 실시한 후 다시 50m를 80% 윈드로 뛰고 돌아온 다음, 점프 투성이인 다이나믹 웜업을 한바탕 뛰어주고 나서야 비로소 본 훈련이 시작됐다. 그리고 서킷, 하체파괴, 인터벌이라는 극혐 3대장이 있었는데, 이 중 하나를 매주 2회 훈련 마무리 전에 진행했다. 한 번은 해변의 모래사장을 뛰었는데, 끝나고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해야 했다. 이런걸 하고 사니 세상 무서울게 없어졌다. 어머니가 공부가 더 편하다고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목표하던 연세대학교에 무사히 입학했다. 사실 이 과정도 우여곡절이 컸다. 안정지원 점수대로부터 무려 40점 정도 떨어지는 수능 언수외(국영수) 표준점수를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뭐 당연한 결과였다. 고집이 쎄서, 모르는 수학문제가 있으면 나름의 답을 도출하기 전까진 절대로 답지를 보지 않았다. 한 문제를 3시간 넘게 잡고 있는 일도 다반사였다. 집에 부모님이 사둔 과학 전집을 읽다가 차원이론에 빠져 엉성한 이해로 4차원에 대한 좌표평면을 그려보겠다고 엉뚱한 삽질을 하면서 시간을 날리기도 했다. 학교 수학선생님에게 가져가 물어봐도 모른다는 답을 받았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어봤더니 네 번째 축은 시간이라는 답을 받았는데, 하필 그 내용을 읽기 전이었어서 “에이 뭔소리야” 하고 또다시 나름의 답을 찾겠다고 난리를 치며 시간을 날렸다. 3차원을 2차원에 그리니까, 그럼 3차원에 4차원을 그리면 되나? 하고 정육면체 위에 그림을 그려대기도 했다. 목표에 맞지 않게 너무 여유를 부려댔다.

각설하고, 그럼 그 40점 떨어지는 점수를 어떻게 만회했냐고? 내가 평소 서울의 입시정보를 입수하던 안양의 체대입시학원에서는 내가 합격 가능하다는 베팅을 했다. 나름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강료도 받지 않겠다고 하며 통큰 제안을 했다. 이 학원은 이전부터 수능점수에 비해 상향지원을 하는 분야에 전문이었다. 상경해서 전공실기를 다졌다. 결국 실기로 수능 점수를 만회하는데 성공해서 무사히 입학했다. 합격 후 어머니는 학원 원장님께 감사의 표시로 입시학원에 사용하기 위해 모아뒀던 돈을 사례금으로 드렸다.

내 소식은 부산에서 다니던 입시학원에 큰 호재로 작용했다. 적당한 수능점수와 함께 합격했다면 그정도 호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우리 아이도 혹시?” 이 사례는 학부모들에게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부산은 여전히 그런 스토리를 많이 팔고 있었다. 학교 앞에서 나눠주는 홍보물엔, “X등급, 어디어디 합격”과 같은 자극적인 문구 일색이었다. 그곳은 그런 호재를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랜만에 방문했더니, 수강생이 폭발적으로 늘어 있었다. 그 때는 그 호재를 소화하기에 아직 늦지 않은 시기였다. 하지만 대표님은 나에게 그곳에 어떤 노하우들이 있었는지,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어떤 계산이 들어맞았는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가의 외제차에 나를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최근에 생긴 여자친구를 소개할 뿐이었다. 난 크게 실망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햇병아리가 봐도 그건 대놓고 망조 신호였다. 하지만 충언을 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미 대표님은 눈빛이 취해 있었다. 결국 정해진 수순대로 그 학원은 폐업했다. 그곳은 호재를 맞이했을진 몰라도, 만들어내는 법은 몰랐다. 운동은 힘들어도 나름 고3 시절을 즐겁게 보내게 해준 곳이었는데, 안타까웠다.

대조적으로, 안양의 학원은 지금도 성업중이다. 둘 사이의 차이는, 이런 사례가 튀어나왔느냐, 아니면 그 사례를 직접 만들어 냈느냐이다. 난 1학년 때부터 입시정보나 전략은 모두 안양의 학원을 통해 얻었다. 전략의 수학적 근거까지 세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는 수능 전에 공부할 시간까지 쪼개서 당장 기초실기 시험을 봐도 될 정도로 육상능력과 기초체력을 완성해 놨지만 수능이 끝나고 추가로 유입된 새로운 수강생들과 함께 또다시 지옥훈련을 진행해야 했다.

상경했을 땐 체력이 아니라 바로 전공 기술훈련에 들어갔다. 체력은 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관리했다. 덕분에 오전에 나가 밤에 돌아오는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오전에 더 일찍 나가서 개인적으로 연습할 에너지가 남아있었다. 매일 더 일찍 가서 스스로 곱씹으며 기술훈련을 했다. 게다가 이곳은 이전의 많은 케이스들을 바탕으로 실기시험을 직접 치뤄야만 알 수 있는 정보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 노하우가 뒷받침된 상태에서 난 그저 또 하나의 상향지원 합격사례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나의 사례를 얻은 것이 아니라, 나의 데이터를 얻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성취에 대해 그것이 내 성취인가 남의 성취인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과, 한 번 한 번의 성취에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걸 알게 되었다. 특히 행운이 클수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특히 명확하게 알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회고록 - 6. 사회화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대학에 입학한 후 친구가 생겼다. 골프선수인 그 친구는 나처럼 4차원이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진짜로 우주로 나갔다. 진짜 우주 이야기도 했다. 차원이론 따위를 이야기해도 그 말을 이해하고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4차원인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오던 그 친구는, 나에게 위험한 사람을 피하는 팁과 같은 것들을 많이 알려줬다. 눈빛, 시선의 움직임, 순간순간 드러나는 표정을 통해 구린 속내가 따로 있는지 없는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그런 팁이다. 인간관계가 얕아서 고정관념이 하나도 형성되지 않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서울 가면 코를 베어간다고, 사이비 종교의 접근이 좀 있었는데, 덕분에 다 잘 빠져나왔다.

그럼 대학교땐 뭘 하고 살았나. 요약하면 라크로스다. 거의 모든걸 포기했다. 교환학생, 학석사연계, 학점, 고등학교 때 가졌던 꿈, 다 포기했다. 고등학교때 가진 꿈이 뭐냐고? 난 고등학교 때부터 파쿠르를 즐기고 있었다. 인간이 가진 태초의 움직임에 집중한 이 운동은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체육대학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 종목을 역학적으로 분석하고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나는 과 동아리로 라크로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기는 딱히 없었고, 동아리 하나는 들어가는게 좋다 하여, 그 이야기를 하신 선배님의 동아리에 그대로 들어갔다. 그 동아리는 학교 최초의 여자 운동동아리였다. 국가대표가 7명이나 있던 동아리의 훈련 강도는 꽤나 괜찮았다. 적당히 기진맥진했다. 주 2회 운동이었다. 적당히 하라는거 하고 출석 하며 지냈다. 하다보니 재미도 좀 붙었다.

하지만 2014년 2학기부터 주장을 맡게 된 이후 꽤나 많은 것들이 바꼈다. 가장 먼저, 파쿠르와 라크로스를 동시에 하면서 주장까지 맡았더니 몸에는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 신호는 2015년에 정강이에 피로골절이 발생하면서 나타났다. 정강이 중간에 대놓고 금이 갔다. 점프를 할 때마다 전기가 올라왔다. 라크로스 중에 삐었던 발목은 알고보니 연골이 찢어져 있었다. 2015년 U19 월드컵이 끝나고, 이어진 2학기를 마무리하자마자 연골편 제거수술을 받았다. 정강이는 1년이 지나도 붙질 않아서 결국 충격파를 동원해서 붙였다.

파쿠르를 그만뒀다. 라크로스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체대동아리의 마지막 체대생이었던 탓에, 라크로스를 포기하면 거기서 그 동아리는 끝이었다. 때문에 중간에 교환학생을 가보는 것도 알아서 포기했다. 중앙동아리로 인준해서 주장을 넘기는 것이 내 유일한 목표였다. 하고싶은건 그 다음에 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배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체대동아리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중앙동아리가 따라올 수 없었고, 체대 후배를 모집하는데 더 집중하길 원했기 때문에 설득이 어려웠다. 그렇게 버티다 결국 체대 학생회에서 협의회 안내도 없이 자기들끼리 회의를 진행시켜, 체대생 비율에 관한 규칙을 통과시키는 바람에 체대 동아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덕분에 비로소 준비하고 있던 인준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다. 선배들을 설득하고, 여성체육 분야에 열정적이던 지도교수님에게 다시금 찾아가 중앙동아리가 될 동아리가 앞으로 여성체육 신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장담하며 도움을 청해 기존 동아리방과 운동장소 대관을 지켜냈다. 한시라도 더 일찍 중앙동아리로 등록하기 위해 체대동아리를 자진 탈퇴했다.

난 사실 선배들이 설득되지 않던 그 시기에도 중앙동아리 인준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 무더기로 졸업하는 바람에 이미 체대 선배층이 무너졌고, 다른 열악하지 않은 스포츠 종목의 동아리가 즐비한 상황에서 체대 후배 모집은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중앙동아리로 옮기는게 동아리가 유지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에 경력자가 거의 없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이 친절한 동아리는 타과생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다. 선배를 설득하는 일은, 내 졸업이 가까워질 수록 쉬워질걸 이미 알고 있었다.

중앙동아리로의 전환이 늦어진 만큼 나는 주장을 계속해야 했다. 2학년 2학기부터 2년 반을 주장직에 몸담았다.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을 장기간 하고 있게 됐다. 중앙동아리 사회는 동아리방과 지원금, 연고전이나 아카라카 티켓같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공유해야 하는 탓에 신규 등록을 반기지 않았다. 신규등록 제출서류를 봤더니, 그냥 “등록하지마"로 읽혔다. 그리고 그 사회 내부는 완전 정치판이었다. 자기 동아리의 이익이 우선인 그런 정치판이다. 그들은 신규등록 절차에 각종 장벽을 쌓고, 자신들의 이익을 사수했다.

그 사회에 빠삭하고, 그런 정치판이 깨끗해지길 원하는 분들을 알게 되었다. 그저 활동을 활발히 했을 뿐, 연고전이나 아카라카조차 관심이 없던 우리 동아리는 깨끗했다. 선배들이 얼마나 활동을 열심히 해왔던지, 이미 우리는 전부터 유명했다. 그분들은 그런 우리 동아리가 중앙동아리로 전환하려 한다는걸 반겼다. 민감한 이슈들을 지속 트레킹하고, 동아리의 평판을 관리하고 인준 자료를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난 그 도움을 얻어 민감한 이슈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부를 단속하거나, 휘말릴 수 있는 활동에 대한 니즈와 타협점을 찾는 일을 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신중해야 했다. 신규등록을 위해 동아리 평판을 관리해 가며 중앙동아리 회원 150명과 현임 회장 20명의 동의를 얻어내야 했고, 때로는 만연한 문제에 대해 눈감아야 했다. 친목 등 동아리 내정은 다른 운영진 분들께 대부분 맡겼다. 그분들까지 없었으면 아마 힘들었을거다.

나는 그런 몸에 맞지 않는 대외 정치질을 하며 탈출을 꿈꾸며 버텼다. 결국 2016년 9월 29일, 동아리연합회 정기회에서 일종의 디펜스 질의를 거쳐 압도적 찬성, 반대 0명으로 인준에 성공했다. 예상질문을 나름대로 생각해서 갔는데, 그 안에서 다 나왔다.

하지만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한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 동아리는 내가 처음으로 사람들과 교류다운 교류를 했던 곳 중 하나다. 그 사람들과의 공간을 무사히 지켜내고 다음으로 넘겨주고 싶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는 성공했다. 이젠 더 능력있는 후배들이 동아리를 잘 이끄는 중이다.

회고록 - 7. 성인식

탈진

라크로스 동아리 주장을 하는 사이 기계공학 복수전공도 시작했다. 수업시간이 너무 좋았다. 밤새며 과제를 해도 행복했다. 동아리의 그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결국 2016년 2학기에 중앙동아리로 인준하는데 성공하자 마자 긴장이 풀려 몸이 무너졌다. 혈뇨를 보기 시작하더니, 신기능이 떨어졌다. 중도 휴학을 했다. 무너지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학교생활 내내 긴장 상태로 지내는 것도 모자라, 안그래도 늦게 시작한 복수전공을, 학석사 연계과정으로 인해 초과학기가 제한된 상태에서 이수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수학과 전공 역학수업과 설계를 동시에 들어야 하는 그런 식이었다. 그 와중에 그놈의 양심이 뭐라고, 족보를 보는 것은 스스로 절대 용납하지 못했다. 주에 3일씩 밤을 새는건 기본이고, 5일 연속으로 잠을 못자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안 죽은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 결국 학점관리에 실패하여 학석사 연계과정도 잘렸다.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고, 중앙동아리 인준 성공으로 주장도 넘겨줄 수 있게 되면서 장기간의 집권(?)으로 인해 하나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던 동아리 업무를 문서화해서 일종의 인수인계 자료를 만들고 주장을 넘겨줬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밤샘을 가능한 피했다.

데드캣 바운스

어차피 학석사 연계도 잘렸겠다, 기계공학과 수업들을 그저 온전히 즐겼다. 수치해석 수업을 통해 프로그래밍에 흥미가 붙었다. 그런데 라크로스 경력이 아주 짧은 사람이 다음 주장을 맡게 됐다. 그래서 미국의 라크로스 훈련 드릴 공개본을 수집한 후 라크로스 훈련 계획을 작성하는 웹앱을 만들기로 했다. 그 목표를 가지고 2017년 여름, 코딩야학 2기를 수료했다. 반복적이고 불필요한 쿼리로 떡칠된 첫 작품이 탄생했다. 아 물론, 안쓴다. 그냥 재미로 만든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취미로 코딩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 나에게 밥을 먹여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혼자 계획표를 웹으로 작성해서 사용하기도 하면서, 소소한 프로젝트를 하며 실력을 갖춰나갔다.

새로운 꿈이 생겼다. Exoskeleton 로봇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군사용 근력증강 로봇에 관심이 있었다. 일단 이걸 하려면 대학원 진학은 필수라 생각했다. 하지만 난 대학원 생활을 모르므로, 한번 체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다짜고짜 KIST 인턴 연구원 채용공고를 보고 콜드메일을 하나 보냈다. 이런걸 연구하고 싶은데, 뭘 준비해 갈까요? 하고. 그 메일을 본 한 박사가 나에게 관심이 있으니 때가 되면 지원하라고 했다는 답을 받았다. 이후 졸업 직전, 인턴 지원 대상 자격이 생겼을 때 연구소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기대에 부풀어 C언어도 미리 공부했다.

졸업 후 인턴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애석하게도, 내 연구 관심사와 관련없는 연구실에 채용되었다. 이름은 지능로봇연구단이지만, 연구실엔 로봇이 없었다. 그당시엔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연구실의 박사가 해외에 체류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관심있는 다른 박사가 데려갔던 것이다. 설명을 들으니 재미는 있어 보여서 그냥 입사했다. 연구활동을 체험하는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좌절

결과는 대실패였다. 유저테스트를 하게 되었는데, 데이터 쿠킹을 유도했다. 정해진 논문의 내용에 들어갈 근거자료가 필요한 것이지, 테스트의 결과가 중요한게 아니었다. 박사들은 아웃라이어로 데이터를 제외한 후, 충분한 설명을 덧붙일 것이라 했지만, 이미 신뢰가 깨진 시점에서 난 시야가 좁아졌다. 내가 실행한 실험이고 내가 낸 통계이므로 책임은 나한테 있다. 나름의 발악으로, 실험설계를 바꾸고, 테스트 시나리오의 task를 바꾸고, 프로그램의 일부 알고리즘까지 개선해서 실제로 유의한 결과를 얻어내서 해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박사들은 실제로 데이터를 제외하더라도 충분한 설명을 덧붙이긴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굳이 조작하지 않아도 밥벌이와 성과에 크게 문제는 없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혈기왕성한 나는, 사회초년생부터 불의라 생각하는 일에 타협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타협은 동아리를 위해 했던걸 마지막으로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다. 책임질게 없는 개인은 무서웠다. 자르든가!

19년 9월, 인턴 계약이 만료되어 연구소를 나왔다. 난 바로 연구의 꿈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그리고 취업활동을 하려던 나에게 다시금 브레이크가 걸렸다. 요로결석이 생긴 것이다. 모든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막연하게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은, 키를 어느 방향으로 둬야 하는지 모르던 참이었다.

갭이어

잠시 푹 쉬는 사이, 연구계에 대한 분노는 줄어들었고,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처럼 회고의 시간을 가졌다. 할 줄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 배울 수 있는 것을 나열했다.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취미로 하고 있던 개발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고작 만들 줄만 아는 나에겐 전공생들이 가진 것들이 없었다. 해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배우기로 했다. 내일배움카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를 이용해 아싸리 모의해커 취업반 과정을 신청했다.

코로나가 창궐했다. 딱 취업반이 시작되는 그 때. 그 시기, 2020년 2월이었다. 인턴을 하며 모아둔 돈을 갉아먹으며 해킹을 배우면서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입이 늘었다. 음력설을 지내기 위해 기차를 타러 집을 나섰는데, 박쥐같이 말라 비틀어진 검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차 밑에서 튀어나와 동생을 부여잡더니 다리를 타고 올라가 품에 안겼다.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눈과 코는 어디서 얻어맞아서 부어 있었고, 털도 듬성듬성했다. 뭐 어쩌나. 살려달라는데 살려야지. 데려와서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자취방 주인도 예전부터 동물을 키워도 된다고 먼저 이야기했었다. 주인집 강아지가 너무 시끄러워서 일종의 민원방지책으로 그랬던 것 같다.

그 고양이는 검은 턱시도였는데, 목, 흉부, 복부, 뒷발에 흰 털이 나 있었다. 까치가 생각났다. 이름을 까치로 지었다. 공교롭게도 설연휴에 만났기 때문에 잘 지은게 되었다. 사실 강력하게 자라라는 의미로 코로나로 할까도 했는데 주변의 만류로 포기했다.

병원비는 월에 50만원씩 날아갔다. 치료와 함께 예방접종들도 빠짐없이 했다. 좀 있으니 피부병이 옮았다. 수의사에게 사람도 치료받았다. 오해는 마라. 사람이 진료를 받은건 아니고, 그냥 고양이 피부병 샴푸를 사람이 써도 효과 있다는 꿀팁 정도 얻었다. 어느정도 건강해진 후 중성화 시술도 이어서 했다. 자연에서 도태된 고양이는 그렇게 이기적 유전자의 미래를 포기당했다. 도심의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시골이었다면 안했을거다. 미안하다. 수컷인데 아직도 애기같은 목소리로 운다. 내시를 만들어 버렸다.

야생 적응기

까치 설날에 찾아온 까치의 활약에 힘입어 통장의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결국 취업반 마무리 단계에서 보안계열 취업을 포기하고 돈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보안계열은 초봉이 KIST 인턴보다도 낮다. 하지만 본격적인 면접철 직전에 선수를 치고 입사제의가 온 극초기 스타트업에서는 KIST 인턴을 경력으로 보고 상향된 연봉을 제시했다. 고양이를 키우려면 집도 나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큰 곳으로 구해야 하고, 사료, 모래 등 부가비용이 발생한다. 스타트업 조기취업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돌고 돌아 옳은 선택이 되었다. 극초기인 만큼, IR도 함께 다니면서 여러 모습들을 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대표님도 사업이 처음이었다. 첫 직원이라 여러모로 잘해줬다. 일은 너무 쉬웠다. 주로 기계공학과에서 배웠던 것들을 이용했다. CAD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하고 시뮬레이션하면서 최적화하고, 3D프린터로 시제품을 출력하고 가공하는 것이 내 주업무였다. 그 외 IR자료 작성, 시장조사, 동영상 편집, 홈페이지 디자인, 개발 등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동아리 주장을 오래 하며 별의 별 일을 다 해봤기 때문에 엉성한 수준이더라도 내 선에서 다 처리할 수 있었다. 시제품의 구조나 기획 등이 정리되며 부품의 성능을 최적화할 회로개발자를 추가로 채용했고, 난 회로개발과, 대표님이 하시던 IR 발표, 정부지원사업 지원서 초안 작성, 세무, 회계를 제외한 모든 일을 했다. 그렇게 해도 하루에 4시간이면 내 일이 끝나버렸다. 주 업무인 시뮬레이션과 기구설계 부분에서 수학적 규칙을 찾으면 바로 코드를 작성해서 자동화해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는 바람에 다른 잡무에 할애하는 시간의 비중이 늘어났다. 지루하고 심심했다.

난 퇴근 후에 해킹을 계속 공부하고 있었다. Capture The Flag(CTF) 형식의 가상 해킹게임을 플래이했다. 그러다가 Offensive Security사의 OSCP 자격증 과정을 알게 되었다. 유명 모의해커 자격증이었다. 땄냐고? 놉. 수업만 신나게 듣고, 지금의 회사로 이직하는 바람에 취득은 못했다. 스타트업에서 일한 지 9개월 째,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던 찰나, 일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제 퇴근 후의 여유시간 따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난 진정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기로 결정하고 지금 회사로 이직했다. 고생길이 열렸다.

사이드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사이드비즈니스 플랫폼을 만드는 사이드프로젝트이자 사이드비즈니스였다. 실제로 사업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투자는 얼마나 받을 것인지, 지분과 수익은 어떻게 배분할지까지 함께 이야기했다. 투자는 가능한 최소로 받아 내부인의 지분을 높이고 최소 비용으로 빠르게 안정적인 매출을 내는데 주력해야 한다는걸 알게 되었다. 투자를 가능한 거하게 땡겨서 기업가치 높게 평가받고 수습은 이후에 하려는 요즘 스타트업들과는 좀 달랐다. 원격으로 일하면서 좀 더 정리된 방식으로 어떻게 일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솔직히 지금 우리 회사보다 훨씬 잘 굴러갔다. 일은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지만 사람들 간의 온도차, 책임의식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쳐갔다. 사이드였기 때문에 과감히 그만뒀다. 라크로스 - 회사 - 사이드프로젝트 순으로 우선순위를 가져가고 있었는데, 바빠진 라크로스 일정으로 체력적 부담이 생기니 그 상황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

회고록 - 8. 정착

처음으로 소개한다. 크래프트테크놀로지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이다. 난 AI 강화학습 에이전트를 이용한 주문집행 소프트웨어를 주 라인업으로 가진, AI Trading Solution 부서의 개발팀에 있다. 입사 당시엔 AXE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도끼 아니다. 현재 3년을 넘겼다.

내가 입사할 때 이 회사는 30명 규모의 회사였다. 잠시후, 소프트뱅크에서 대규모 투자가 들어왔다. 인원이 80명으로 급증했다. 물론 우리팀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규모를 유지중이다. 회사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하기위해 팀이 신설되고 공격적인 채용이 진행됐던 것이다. 처음엔 기대했다. 그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우리팀은 나중에 이런걸 하고 있겠지. 물론 그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우리 팀은 그냥 평온하게 하던거 하고 있다. 회사는 다시 대박을 칠 무언가를 기다리며 여러 시도들을 하고 있다.

우리 팀은 팀의 제품을 증권사에 납품하는 형식의 사업을 하고 있었다. 여타 기술기업들이 의례 그렇게 실수하듯, “좋은거 만들어두면 쓰겠지"라는 마인드가 좀 있었다. 제품과 니즈는 충돌했고, 우리에겐 “이럴거면 왜 AI를 도입하려는거지?”하는 불만이 좀 있었다. 하지만, 을은 갑이 원하는걸 해줘야 하니까, 일단 들어줬다. 결론부터 말하면 잘했다. 여기서 들이받았으면 제품은 영영 제자리걸음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성능의 못쓰는 물건으로.

제품은 현재 4.0버전까지 와 있다. 내가 입사할 당시는 1.0에서 2.0 버전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1.0의 성능에 만족한 고객사와 대형 프로젝트로 2.0을 기획하고 개발을 진행했다. 난 이 버전을 설치하고 세팅하는 시기에 입사했다. 해킹 공부로 얻은 인프라쪽 지식과 개발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사할 수 있었다. 딱 그런 사람이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보딩 시스템이 없는, 사수조차 없는 이 팀에서는, 프로그램이 뭘 하는 것인지 등 소개 문서 하나 없이 다짜고짜 일부 마이크로서비스의 코드를 분석하고 리펙터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난 트레이딩에 대해서는 겉핥기 식으로 잠시 주식투자를 해본게 다였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뭘 하는지 이해하려니 막연하고 막막했다. 심지어 마이크로서비스 시스템은, 서비스의 목적을 더 알기 어렵게 만들었다.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설치 업무에 적응하는게 더 수월했다. 설치업무를 하면서, 시스템을 파악하여 코드베이스를 파악해나갔다.

2.0은 한가지 큰 과제가 있었다. 초대형이라는거다. B2B2C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최신 개발 트렌드와 기술스택도 대거 도입했다. 2021년이었던 당시에 이미 Rust를 도입했고, 펄서를 메시지큐로 도입하고, 쿠버네티스를 도입하고, IaC도 하겠다며 helm과 Terraform까지 이용했다. 그것도 증권사의 폐쇄망 Cloud에서! 천재들의 세계는 엄청나군! 난 그저 그걸 내것으로 흡수하고, 그 원대한 계획을 실제로 실현해내는데 집중했다. 2.0 막바지에 갔을 땐, 모르는건 많지만 겁먹진 않는 개발자가 되어 있었다. 가장 비효율적인 곳에 들어왔기에 가능한 성장이였다. 이런 기회는 이제 주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회사는 더이상 이런 삽질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제 성과를 내야 하는 시기이다. 나 또한 이런 개고생을 경험할 기회를 줄 생각은 없다. 버틸 확률이 10%일 것이다. 만든 사람들도 나중에 다 퇴사했을 정도니까. 진짜 중간에 별의 별 생각을 다했다. 무사히 넘겼으니까 이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이 어려운게 문제가 아니다. 설치 마무리 후 장애로 인해 매일같이 오는 긴급전화와, 긴급 출장업무가 문제였다.

초기 B2B2C로 기획되었던 프로젝트는 시간이 지나며 B2B로 축소됐다. 동시작업 10000건 목표는 없던 일이 되었다. 10000건을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품은 B2B에서 그냥 돼지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먹이는 많이 먹는데 고기는 팔 곳이 없는 그런 돼지였다. 2.0 프로젝트의 주역들은 모두 퇴사했다. 충원은 이보다 덜했다. 프로젝트가 축소되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잠시 팀을 맡던 팀장도 퇴사했다. 유지보수하는 입장에서 너무 힘들었다. 여기저기 함정이 도사리고 있고, 커다란 사이즈 만큼 버그도 많았다. 천재 개발자들이 만든 힙한 야심작은, 아무리 그들이 천재였어도 허점이 많았다. 당연하다. 버그 없는 프로그램은 없다. 매일 오전 카톡이 울리면 고객사 연락인가 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서비스를 안정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2.0의 주역들과 그 다음 팀장이 모두 퇴사하고, 팀장 제의를 강력히 거절했다. 동아리에서의 그 경험은 팀장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다시는 그런거 안하기로 했다. 팀에서 조용히 계시던 시니어 개발자가 팀장이 되었다. 대신 나에게 많은 권한을 주셨다. 시니어 팀장님은 혼자 다른 언어를 쓰고 계셨기 때문이다. 당시 3.0 프로젝트가 진행중이었고, QA가 입사하며 버전 및 품질관리도 시작했다. 쓸데없는 중복을 버리고 안정성을 높이는게 3.0의 목표였다. 팀장님은 중복된 기능을 가진 세 개의 서비스를 통합했다. 3.0 프로젝트는 커졌다. 난 내가 담당하던 마이크로서비스도 완전 새로 개발했다. 그리고 아싸리 쓸데없는걸 다 들어내기로 했다. 인프라도 불필요한 것들을 다 날려버렸다. 이제 내가 아니어도 기본적인 설치나 디버깅 업무가 가능하게 되었다. 맞다. 제발 이 지옥같은 업무를 좀 분산시켜 달라는 아우성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새로 들어온 매우 협조적인 팀원이 간소화된 제품 설치 과정을 따라다니며 배우면서 설치 업무를 돕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3.0 버전으로 넘어가면서, 일에 여유가 좀 생겼다. 리서치팀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매일 회사에 쌓이고 있는 데이터를 분석해서 우리 팀의 모델 학습에 사용할 수 있도록 기존에 사용하던 고가의 구매 데이터 형태로 변환하는 프로젝트였다. 이것이 진행되면, 데이터 구매 비용 부담으로 인해 잠시 멈췄던 학습을 다시 재개할 수 있었고, 타 거래소로의 확장도 용이해질 것이었다. CTO님의 퇴사 전 인수인계로 이 프로젝트에 대한 기획을 넘겨받았고, 무사히 개발해서 사용중이다.

시니어 팀장님이 이민을 가면서 퇴사하고, 잠시 팀장을 하다가 퇴사했던 팀장이 재입사했다.

다음은 4.0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4.0의 목표는 코드의 가독성, 유지보수성이다. 여기에 모든 기능의 완전한 이중화까지 지원한다. 개발언어를 Rust로 통일하고, 중앙화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공통 라이브러리로 관리한다. 모노리포 구조로 말이다. 코딩컨벤션도 정해졌다.

그러던 중 또다른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했다. 4.0 프로젝트 도중 DMA 프로토콜을 병행해서 개발해야 하게 되었다. 일정이 겹쳐서 끼어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난 허리 디스크가 파열되었다. 하지만 대체가 없어서 재택근무로 전환해서 마지막까지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했다. 힘들긴 하다. 집에 갇혀서 일하는 느낌이다. 그 상태로 새벽 3시까지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다. 근데 하지 않으면 일정을 맞출 수가 없다. 뭐, 언젠간 지나갈 일이다.

회고록 - 9. 라크로스

대학 졸업 후, 나에게 좌절을 선사했던 연구소의 생활은 득과 실이 확실했다. 라크로스 연습을 하기엔 최고였다. 야외 스쿼시장에서 월볼(벽에 공을 치며 던지고 받는 것)이 가능했고, 웨이트 시설도 공짜였다. 필드도 있었다. 동아리 인준이니 주장이니 하는 부담도 없었다. 그 시기에 실력이 많이 늘었다. 마치 밥먹고 약을 먹듯이 퇴근하면서 연습을 했다. 연구실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해방구이기도 했다. 대학원생들이 고강도 크로스핏을 왜 많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2019 아시아 환태평양 선수권대회에서는 일본에 사는 두 선수와 함께했다. 전설적인 골리와 탑 레벨 수비수였다. 그리고 졸업 후부터 심심해서 다니던 토요라크로스의 모임장이자, 현재 서울진도스 팀의 시초가 된 사람과, 한국외대 여자팀을 창단하고, 호주에 유학까지 가서 라크로스 선진국의 문화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그만두려 했던 라크로스는 그렇게 수명이 연장됐다. 오프데이 때 그들이 함께 이야기하던 비전인 “즐거운 라크로스”를 마지막으로 믿어보고 싶었다. 연구소를 다니며 자유인으로서 즐긴 라크로스 또한 생각보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제 즐길 수 있구나. 서울진도스 설립에 함께했다. 역시나 즐거웠다.

대학 생활을 통째로 앗아간 이 애증의 스포츠는 지금 삶에 있어 주를 차지했다. 난 회사에도 라크로스가 1순위라고 대놓고 밝혔다. 면접 자리에서 대표팀 일정으로 인해 휴가를 길게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미리 이야기하고 허락까지 받아놓았다. 대신 이런 사례가 나쁜 사례가 아닌 좋은 선례로 남게 하고자 고생스러운 업무도 마다하지 않고 기한에 목숨걸고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다. 관성같은 것이었다. 대학생 때 라크로스를 하는 내내 책임자 자리에 있었다보니, 행동 하나 하나 함부로 하기 어려웠는데, 이게 습관이 되었다. 특히나 생소한 스포츠 특성 상, 내 행동이 라크로스를 하는 이들을 대표하게 되기 때문에, 틀린 것도 아니었다. 나를 비롯, 선배들이 나쁜 선례를 남기면 후배들은 라크로스에 열정적이었을 수록 사회에서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크로스가 아니였으면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늑장을 부리며 일하고, 고생길일 것이라는 팀내 SRE 역할을 자처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팀에서 대퇴사 바람이 불며 타 회사에서 오퍼레터를 받았을 때도 바로 이직했을 것이다. 대규모 트레픽과 SaaS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며, 파격적인 연봉인상을 얻어내며 말이다. 물론 오퍼레터보다는 조금 적지만, 회사에서는 이직하는 수준으로 연봉을 파격적으로 올려줬다.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서비스를 실제로 판매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선하고 안정화한 경험도 얻었고, 기술독재에 대한 경각심도 얻었다. 이곳은 당장 어렵더라도 언젠간 하는 만큼 대가를 얻는 곳이구나. 운좋게도 나름 좋은 선택이 되었다. 아, 물론 요즘은 좀 막나가고 있다.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풀린 정신으로 실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더더욱 제대로 쉬기로 했다.

2022년, 코로나로 무기한 연기됐던 월드컵이 드디어 열렸다. 역대 최악이었다. 우리가 코로나를 핑계로 멈춰있는 사이 다른 나라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20점차 가까이 이기던 중국에게 조차 패배했다. 우리는 멈춰있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했다. 그와중에 난 허리에 갑자기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의무실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마취 파스나 온찜질 이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디스크 파열일지도 모르는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앓다가 좋아졌다를 반복하면서 후회 가득한 대회를 치렀다. 귀국 후 신경차단술을 받았다. 디스크 파열은 아니였지만, 내 허리는 이미 한 곳이 작살난 채 오래되어 있었다. 그곳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작살날 것이라 했다. 이미 치료는 늦었고, 언제 은퇴할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난 소속팀인 서울진도스에서 라크로스 인생 2막을 그저 즐겼다. 이미 대학교 졸업 이후부터는 플러스 알파를 지내고 있었던 것과 다름없다. 어차피 마지막이다. 후회없이 즐기기로 했다.

서울진도스의 “즐거운 라크로스”라는 추상적인 비전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그리고, 이곳엔 쓸 곳엔 쓰자는 진취적인 사람들이 모였다. 이왕이면 더 좋은 구장을 빌리려 하고, 양질의 훈련을 추구하고, 코치도 모셨다. 코치들 또한 적은 사례비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넘쳤다. 코치의 비전은 “라크로스다운 라크로스”였다. 난 이들에게 항상 감사하다. 자칫 잘못하면 대학생활을 통째로 앗아간 라크로스를 버림과 동시에 라크로스를 시작한 것에 대한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 뻔 했는데, 즐거운 라크로스를 경험한 덕에 그런 결말은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

2023년부터는 라크로스 선진국인 일본에서 매년 개최되는 오키나와 오픈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서울진도스는 한국에서 따라올 팀이 없게 되었다. 이후 모든 국내 리그를 우승하고 있다. 오키나와 오픈에 그저 참여하는게 아니라, 그 대회에서 성적을 거두기 위해 그간의 대표팀 준비보다도 더한 열정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 대회에서 사상 최고로 많이 늘었다. 아니 곧 은퇴할 사람이 아쉽게 왜이러나…

2024년 오키나와 오픈에서는 디펜스 주장을 하게 되었다. 다시는 하지 않기로 했을 터인 주장이었는데, 그냥 결정되어 통보되는 바람에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내정을 다른 운영진에게 맡겼던, 성격에 맞지도 않는 바깥일이나 꾸역꾸역 하던 그런 주장 경험만 있었기 때문에 꽤나 막막했다. 사실 그런 주장 경험은 나에게 트라우마와 다를 바 없었다. 다행히도 함께 주장을 맡았던 두 명이 이 약점을 다 커버해 줬다. 주변에게 큰 기대치를 가지고 팀을 이끄는 성격을 가진 한 명은 팀의 동기 수준을 높게 가져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언변이 좋고 성격도 둥글둥글한 다른 한 명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잘 해결하고 각종 공지 내용도 유도리 있게 잘 작성했다. 팀원 간의 조화를 이끄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난 그런 능력들은 없었다. 장비 담당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차를 끌고 장비를 운동 장소로 가져가는게 내 임무였다. 그리고 난 그런 단순하고 몸만 좀 고생하면 되는 역할이 참 좋았다. 난 타인에게 기대를 거는 타입도 아니다. 말을 조리있게 즉석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그저 글을 쓰는 것이 그나마 가능했으므로, 훈련이 끝나고 귀가하면 그날의 디펜스 훈련중 들었던 피드백을 요약해서 업로드하고, 꾸중을 잔뜩 들었던 디펜스 팀원들에게 그래도 잘한 것, 발전한 것이 있음을 기억케 해주기 위해 나름 생각나는 잘한 점들도 피드백에 추가했다.

2년간 오키나와 오픈에 참여하면서, 가장 큰 행복이 찾아왔다. 드디어 미래를 맡길 만한 골리 후배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2023년 대회에선 불시에 당할 은퇴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선구안과 눈과 손의 협응이 좋고 안정적이며 힘도 좋은 골리가 나타났다. 특유의 안정성을 무기로 미래에 강력한 골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2024년 대회에선 체구가 작고 힘은 좀 떨어지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이에 맞게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선수가 나타났다. 노력은 가장 강력한 재능이다. 그리고 다리에 시퍼렇게 든 멍을 보고도 그저 공 하나 막았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후에 강력한 멘탈을 장착한 선수가 될 것이다. 이 친구는 지금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가서 그곳의 팀에 들어가 거의 매일 연습을 하고 있다. 강력한 기본기와 멘탈을 가지고 돌아올 그날이 기대된다.

그리고 지금은 2025년 아시아-환태평양 권역에서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겨루는 퀄리파이어 대회를 준비중이다. 난 지금 허리 디스크 파열로 인해 장기간 휴식중이다.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크다. 출전권 따야하는데. 하지만 이번에 신우신염을 얻어맞고, 폐에 물이 차고, 코로나까지 걸리면서, 집중해서 휴식 기간을 빠르고 밀도 높게 가져가기로 했다. 지금은 완전히 마음을 놓고 쉬고 있다. 그게 제일 빠른 길이다. 버텨라.

디스크가 호전되며 일상을 조금씩 회복하고 병치레로 무너지기 전까지의 기간 사이에, 이곳에서 또 한 명의 골리를 만났다. 골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매우 뛰어났다. 공을 던지는 것만 봐도 몸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눈에 바로 보였다. 빠르게 성장할 것임은 틀림없다. 운동 능력은 문제가 없고, 오히려 몸에 힘을 빼고 긴장을 풀고 머리를 비우는 것이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과거 힘만 넘쳐서 튀어다니던 나처럼 말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골리 지망자가 나타났다. 아직 장비가 없어서, 수비수 훈련을 하면서 훈련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가 있었다. 그 습관 자체가 바로 미래의 성장을 암시한다. 기록은 누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나 또한 과거 훈련 내용과, 그날의 멘탈 등을 기록한 노트가 있다.

회고록 - 10. 미래

퀄리파이어에 대한 걱정은 산더미지만, 지금 난 나름 행복하다. 한국의 골문을 지킬 후배들이 4명이나 나타났다. 덕분에 난 은퇴 다음의 스텝을 고민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난 내가 나이가 더 많고, 이미 더 성공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오키나와 오픈을 시작으로, 대회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퇴사까지 감행하는 수준의 열정있는 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열정에 대한 보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없다. 그들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사실 그들이 퇴사할 때 나도 퇴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몸이 맛이 가고 있는 지금, 은퇴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은퇴 후에도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꽤 많은 동료들은 지금 사회로 나오기 위해 알을 까는 시기에 있다. 불경기라서 계속 눈에 밟힌다. 나에게 이들을 지원하고 끌어줄 수 있는 더 큰 힘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난 그런 역경들을 좀 일찍 맞이해서 괜찮은 경제 사이클 위에서 나름의 연착륙을 했지만, 이들은 지금 불경기 사이클 위에서 겪고 있다. 물론 모두들 강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고, 충분히 이겨낼 사람들이다.

사회의 성인으로 성장하고 독립해서 자리를 잡기 위해 필히 수반되는 일들은 언제나 더럽게 힘들고, 불안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우울한걸 알기에 좀 측은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건 그저 그들이 안정될 때까지 믿고 기다리면서, 말하고자 하는걸 듣고, 말하기 싫은걸 묻지 않으며,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능력껏 돕는 것 뿐이다. 마치 내가 대학교 생활을 버텨낼 수 있도록 도와줬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난 지금 가진건 별로 없지만, 어차피 라크로스에 인생을 빼앗긴 김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최대를 해보고 싶다. 빼앗긴 인생이라도, 그 인생이 의미를 가지면 그만 아닌가. 그 의미를 준게 지금 동료들이다. 내가 가진걸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세상을 사고 싶다. 인간은 죽지만, 세상은 남는다. 내가 원하는 세상을 사려면 가진 것이 많아야 한다. 그러려면 많이 가져야 한다. 어떻게 많이 가질 수 있는지는, 머리로는 대충 안다. 이룰 줄 몰라서 문제일 뿐. 일단 월급쟁이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뭐,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할 예정이다. 지름길따윈 없다. 지금은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 일단은 후배들의 열정을 사는 일을 시도중이다. 물론 선택은 후배의 몫이지만, 약간의 염원과 기대를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