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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하는 블로그

회고록 - 6. 사회화

Tags = [ memoir ]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대학에 입학한 후 친구가 생겼다. 골프선수인 그 친구는 나처럼 4차원이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진짜로 우주로 나갔다. 진짜 우주 이야기도 했다. 차원이론 따위를 이야기해도 그 말을 이해하고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4차원인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오던 그 친구는, 나에게 위험한 사람을 피하는 팁과 같은 것들을 많이 알려줬다. 눈빛, 시선의 움직임, 순간순간 드러나는 표정을 통해 구린 속내가 따로 있는지 없는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그런 팁이다. 인간관계가 얕아서 고정관념이 하나도 형성되지 않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서울 가면 코를 베어간다고, 사이비 종교의 접근이 좀 있었는데, 덕분에 다 잘 빠져나왔다.

그럼 대학교땐 뭘 하고 살았나. 요약하면 라크로스다. 거의 모든걸 포기했다. 교환학생, 학석사연계, 학점, 고등학교 때 가졌던 꿈, 다 포기했다. 고등학교때 가진 꿈이 뭐냐고? 난 고등학교 때부터 파쿠르를 즐기고 있었다. 인간이 가진 태초의 움직임에 집중한 이 운동은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체육대학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 종목을 역학적으로 분석하고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내 꿈이었다.

나는 과 동아리로 라크로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기는 딱히 없었고, 동아리 하나는 들어가는게 좋다 하여, 그 이야기를 하신 선배님의 동아리에 그대로 들어갔다. 그 동아리는 학교 최초의 여자 운동동아리였다. 국가대표가 7명이나 있던 동아리의 훈련 강도는 꽤나 괜찮았다. 적당히 기진맥진했다. 주 2회 운동이었다. 적당히 하라는거 하고 출석 하며 지냈다. 하다보니 재미도 좀 붙었다.

하지만 2014년 2학기부터 주장을 맡게 된 이후 꽤나 많은 것들이 바꼈다. 가장 먼저, 파쿠르와 라크로스를 동시에 하면서 주장까지 맡았더니 몸에는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 신호는 2015년에 정강이에 피로골절이 발생하면서 나타났다. 정강이 중간에 대놓고 금이 갔다. 점프를 할 때마다 전기가 올라왔다. 라크로스 중에 삐었던 발목은 알고보니 연골이 찢어져 있었다. 2015년 U19 월드컵이 끝나고, 이어진 2학기를 마무리하자마자 연골편 제거수술을 받았다. 정강이는 1년이 지나도 붙질 않아서 결국 충격파를 동원해서 붙였다.

파쿠르를 그만뒀다. 라크로스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체대동아리의 마지막 체대생이었던 탓에, 라크로스를 포기하면 거기서 그 동아리는 끝이었다. 때문에 중간에 교환학생을 가보는 것도 알아서 포기했다. 중앙동아리로 인준해서 주장을 넘기는 것이 내 유일한 목표였다. 하고싶은건 그 다음에 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배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체대동아리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중앙동아리가 따라올 수 없었고, 체대 후배를 모집하는데 더 집중하길 원했기 때문에 설득이 어려웠다. 그렇게 버티다 결국 체대 학생회에서 협의회 안내도 없이 자기들끼리 회의를 진행시켜, 체대생 비율에 관한 규칙을 통과시키는 바람에 체대 동아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덕분에 비로소 준비하고 있던 인준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다. 선배들을 설득하고, 여성체육 분야에 열정적이던 지도교수님에게 다시금 찾아가 중앙동아리가 될 동아리가 앞으로 여성체육 신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장담하며 도움을 청해 기존 동아리방과 운동장소 대관을 지켜냈다. 한시라도 더 일찍 중앙동아리로 등록하기 위해 체대동아리를 자진 탈퇴했다.

난 사실 선배들이 설득되지 않던 그 시기에도 중앙동아리 인준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 무더기로 졸업하는 바람에 이미 체대 선배층이 무너졌고, 다른 열악하지 않은 스포츠 종목의 동아리가 즐비한 상황에서 체대 후배 모집은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중앙동아리로 옮기는게 동아리가 유지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에 경력자가 거의 없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는 이 친절한 동아리는 타과생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다. 선배를 설득하는 일은, 내 졸업이 가까워질 수록 쉬워질걸 이미 알고 있었다.

중앙동아리로의 전환이 늦어진 만큼 나는 주장을 계속해야 했다. 2학년 2학기부터 2년 반을 주장직에 몸담았다.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을 장기간 하고 있게 됐다. 중앙동아리 사회는 동아리방과 지원금, 연고전이나 아카라카 티켓같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공유해야 하는 탓에 신규 등록을 반기지 않았다. 신규등록 제출서류를 봤더니, 그냥 “등록하지마"로 읽혔다. 그리고 그 사회 내부는 완전 정치판이었다. 자기 동아리의 이익이 우선인 그런 정치판이다. 그들은 신규등록 절차에 각종 장벽을 쌓고, 자신들의 이익을 사수했다.

그 사회에 빠삭하고, 그런 정치판이 깨끗해지길 원하는 분들을 알게 되었다. 그저 활동을 활발히 했을 뿐, 연고전이나 아카라카조차 관심이 없던 우리 동아리는 깨끗했다. 선배들이 얼마나 활동을 열심히 해왔던지, 이미 우리는 전부터 유명했다. 그분들은 그런 우리 동아리가 중앙동아리로 전환하려 한다는걸 반겼다. 민감한 이슈들을 지속 트레킹하고, 동아리의 평판을 관리하고 인준 자료를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난 그 도움을 얻어 민감한 이슈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부를 단속하거나, 휘말릴 수 있는 활동에 대한 니즈와 타협점을 찾는 일을 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신중해야 했다. 신규등록을 위해 동아리 평판을 관리해 가며 중앙동아리 회원 150명과 현임 회장 20명의 동의를 얻어내야 했고, 때로는 만연한 문제에 대해 눈감아야 했다. 친목 등 동아리 내정은 다른 운영진 분들께 대부분 맡겼다. 그분들까지 없었으면 아마 힘들었을거다.

나는 그런 몸에 맞지 않는 대외 정치질을 하며 탈출을 꿈꾸며 버텼다. 결국 2016년 9월 29일, 동아리연합회 정기회에서 일종의 디펜스 질의를 거쳐 압도적 찬성, 반대 0명으로 인준에 성공했다. 예상질문을 나름대로 생각해서 갔는데, 그 안에서 다 나왔다.

하지만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한걸 후회하진 않는다. 그 동아리는 내가 처음으로 사람들과 교류다운 교류를 했던 곳 중 하나다. 그 사람들과의 공간을 무사히 지켜내고 다음으로 넘겨주고 싶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는 성공했다. 이젠 더 능력있는 후배들이 동아리를 잘 이끄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