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lshitting Blog

개소리하는 블로그

회고록 - 9. 라크로스

Tags = [ memoir ]

대학 졸업 후, 나에게 좌절을 선사했던 연구소의 생활은 득과 실이 확실했다. 라크로스 연습을 하기엔 최고였다. 야외 스쿼시장에서 월볼(벽에 공을 치며 던지고 받는 것)이 가능했고, 웨이트 시설도 공짜였다. 필드도 있었다. 동아리 인준이니 주장이니 하는 부담도 없었다. 그 시기에 실력이 많이 늘었다. 마치 밥먹고 약을 먹듯이 퇴근하면서 연습을 했다. 연구실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해방구이기도 했다. 대학원생들이 고강도 크로스핏을 왜 많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2019 아시아 환태평양 선수권대회에서는 일본에 사는 두 선수와 함께했다. 전설적인 골리와 탑 레벨 수비수였다. 그리고 졸업 후부터 심심해서 다니던 토요라크로스의 모임장이자, 현재 서울진도스 팀의 시초가 된 사람과, 한국외대 여자팀을 창단하고, 호주에 유학까지 가서 라크로스 선진국의 문화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그만두려 했던 라크로스는 그렇게 수명이 연장됐다. 오프데이 때 그들이 함께 이야기하던 비전인 “즐거운 라크로스”를 마지막으로 믿어보고 싶었다. 연구소를 다니며 자유인으로서 즐긴 라크로스 또한 생각보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제 즐길 수 있구나. 서울진도스 설립에 함께했다. 역시나 즐거웠다.

대학 생활을 통째로 앗아간 이 애증의 스포츠는 지금 삶에 있어 주를 차지했다. 난 회사에도 라크로스가 1순위라고 대놓고 밝혔다. 면접 자리에서 대표팀 일정으로 인해 휴가를 길게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미리 이야기하고 허락까지 받아놓았다. 대신 이런 사례가 나쁜 사례가 아닌 좋은 선례로 남게 하고자 고생스러운 업무도 마다하지 않고 기한에 목숨걸고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다. 관성같은 것이었다. 대학생 때 라크로스를 하는 내내 책임자 자리에 있었다보니, 행동 하나 하나 함부로 하기 어려웠는데, 이게 습관이 되었다. 특히나 생소한 스포츠 특성 상, 내 행동이 라크로스를 하는 이들을 대표하게 되기 때문에, 틀린 것도 아니었다. 나를 비롯, 선배들이 나쁜 선례를 남기면 후배들은 라크로스에 열정적이었을 수록 사회에서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크로스가 아니였으면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늑장을 부리며 일하고, 고생길일 것이라는 팀내 SRE 역할을 자처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팀에서 대퇴사 바람이 불며 타 회사에서 오퍼레터를 받았을 때도 바로 이직했을 것이다. 대규모 트레픽과 SaaS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며, 파격적인 연봉인상을 얻어내며 말이다. 물론 오퍼레터보다는 조금 적지만, 회사에서는 이직하는 수준으로 연봉을 파격적으로 올려줬다.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서비스를 실제로 판매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선하고 안정화한 경험도 얻었고, 기술독재에 대한 경각심도 얻었다. 이곳은 당장 어렵더라도 언젠간 하는 만큼 대가를 얻는 곳이구나. 운좋게도 나름 좋은 선택이 되었다. 아, 물론 요즘은 좀 막나가고 있다. 에너지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풀린 정신으로 실수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더더욱 제대로 쉬기로 했다.

2022년, 코로나로 무기한 연기됐던 월드컵이 드디어 열렸다. 역대 최악이었다. 우리가 코로나를 핑계로 멈춰있는 사이 다른 나라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20점차 가까이 이기던 중국에게 조차 패배했다. 우리는 멈춰있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했다. 그와중에 난 허리에 갑자기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의무실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마취 파스나 온찜질 이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디스크 파열일지도 모르는 증상이었기 때문이다. 앓다가 좋아졌다를 반복하면서 후회 가득한 대회를 치렀다. 귀국 후 신경차단술을 받았다. 디스크 파열은 아니였지만, 내 허리는 이미 한 곳이 작살난 채 오래되어 있었다. 그곳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작살날 것이라 했다. 이미 치료는 늦었고, 언제 은퇴할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난 소속팀인 서울진도스에서 라크로스 인생 2막을 그저 즐겼다. 이미 대학교 졸업 이후부터는 플러스 알파를 지내고 있었던 것과 다름없다. 어차피 마지막이다. 후회없이 즐기기로 했다.

서울진도스의 “즐거운 라크로스”라는 추상적인 비전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그리고, 이곳엔 쓸 곳엔 쓰자는 진취적인 사람들이 모였다. 이왕이면 더 좋은 구장을 빌리려 하고, 양질의 훈련을 추구하고, 코치도 모셨다. 코치들 또한 적은 사례비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넘쳤다. 코치의 비전은 “라크로스다운 라크로스”였다. 난 이들에게 항상 감사하다. 자칫 잘못하면 대학생활을 통째로 앗아간 라크로스를 버림과 동시에 라크로스를 시작한 것에 대한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 뻔 했는데, 즐거운 라크로스를 경험한 덕에 그런 결말은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

2023년부터는 라크로스 선진국인 일본에서 매년 개최되는 오키나와 오픈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서울진도스는 한국에서 따라올 팀이 없게 되었다. 이후 모든 국내 리그를 우승하고 있다. 오키나와 오픈에 그저 참여하는게 아니라, 그 대회에서 성적을 거두기 위해 그간의 대표팀 준비보다도 더한 열정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 대회에서 사상 최고로 많이 늘었다. 아니 곧 은퇴할 사람이 아쉽게 왜이러나…

2024년 오키나와 오픈에서는 디펜스 주장을 하게 되었다. 다시는 하지 않기로 했을 터인 주장이었는데, 그냥 결정되어 통보되는 바람에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내정을 다른 운영진에게 맡겼던, 성격에 맞지도 않는 바깥일이나 꾸역꾸역 하던 그런 주장 경험만 있었기 때문에 꽤나 막막했다. 사실 그런 주장 경험은 나에게 트라우마와 다를 바 없었다. 다행히도 함께 주장을 맡았던 두 명이 이 약점을 다 커버해 줬다. 주변에게 큰 기대치를 가지고 팀을 이끄는 성격을 가진 한 명은 팀의 동기 수준을 높게 가져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언변이 좋고 성격도 둥글둥글한 다른 한 명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잘 해결하고 각종 공지 내용도 유도리 있게 잘 작성했다. 팀원 간의 조화를 이끄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난 그런 능력들은 없었다. 장비 담당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차를 끌고 장비를 운동 장소로 가져가는게 내 임무였다. 그리고 난 그런 단순하고 몸만 좀 고생하면 되는 역할이 참 좋았다. 난 타인에게 기대를 거는 타입도 아니다. 말을 조리있게 즉석으로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그저 글을 쓰는 것이 그나마 가능했으므로, 훈련이 끝나고 귀가하면 그날의 디펜스 훈련중 들었던 피드백을 요약해서 업로드하고, 꾸중을 잔뜩 들었던 디펜스 팀원들에게 그래도 잘한 것, 발전한 것이 있음을 기억케 해주기 위해 나름 생각나는 잘한 점들도 피드백에 추가했다.

2년간 오키나와 오픈에 참여하면서, 가장 큰 행복이 찾아왔다. 드디어 미래를 맡길 만한 골리 후배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2023년 대회에선 불시에 당할 은퇴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선구안과 눈과 손의 협응이 좋고 안정적이며 힘도 좋은 골리가 나타났다. 특유의 안정성을 무기로 미래에 강력한 골리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2024년 대회에선 체구가 작고 힘은 좀 떨어지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이에 맞게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선수가 나타났다. 노력은 가장 강력한 재능이다. 그리고 다리에 시퍼렇게 든 멍을 보고도 그저 공 하나 막았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후에 강력한 멘탈을 장착한 선수가 될 것이다. 이 친구는 지금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가서 그곳의 팀에 들어가 거의 매일 연습을 하고 있다. 강력한 기본기와 멘탈을 가지고 돌아올 그날이 기대된다.

그리고 지금은 2025년 아시아-환태평양 권역에서 월드컵 출전권을 놓고 겨루는 퀄리파이어 대회를 준비중이다. 난 지금 허리 디스크 파열로 인해 장기간 휴식중이다.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크다. 출전권 따야하는데. 하지만 이번에 신우신염을 얻어맞고, 폐에 물이 차고, 코로나까지 걸리면서, 집중해서 휴식 기간을 빠르고 밀도 높게 가져가기로 했다. 지금은 완전히 마음을 놓고 쉬고 있다. 그게 제일 빠른 길이다. 버텨라.

디스크가 호전되며 일상을 조금씩 회복하고 병치레로 무너지기 전까지의 기간 사이에, 이곳에서 또 한 명의 골리를 만났다. 골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매우 뛰어났다. 공을 던지는 것만 봐도 몸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눈에 바로 보였다. 빠르게 성장할 것임은 틀림없다. 운동 능력은 문제가 없고, 오히려 몸에 힘을 빼고 긴장을 풀고 머리를 비우는 것이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과거 힘만 넘쳐서 튀어다니던 나처럼 말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골리 지망자가 나타났다. 아직 장비가 없어서, 수비수 훈련을 하면서 훈련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가 있었다. 그 습관 자체가 바로 미래의 성장을 암시한다. 기록은 누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나 또한 과거 훈련 내용과, 그날의 멘탈 등을 기록한 노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