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어른이 되고 나서 힘들다 힘들다 하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어른이 되면 자기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케어를 받던 시절보다 몇 배로 고달프고 힘든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하나씩 공략하는 맛도 있다. 초 고난이도 RPG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자.
케어를 받는 대가
다들 자기가 케어를 받기만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없지 않았다. 물론, 가족 뽑기운에 따라 이 대가의 크고 작음이 다르다. 누군가는 부모님이 강압적이어서 부모님 그늘 아래 꼭두각시처럼 살아야 하는 대가를 치른다. 누군가는 부모님의 인성이 나빠 스트레스를 지고 산다. 누군가는 부모님이 아프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어 소년/소녀가장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물론 이 경우 케어를 받는다고 하긴 어렵겠다). 또 누군가는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꿈을 이루기 위해 드라이브를 걸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적당한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산다. 이건 다 뽑기운이다. 태어나는 것 자체도 내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유전자와 기질도 모두 뽑기운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린 대부분 학교에 다니면서, 얕디 얕은 다양한 과목을 공부한다. 연결고리를 하나씩 생략해 둔 채 암기를 요구한다. 내가 그 과목에 관심이 있든 없든, 어느 정도 강제적으로 그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럼 그게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폭넓은 분야를 접하고 그에 대해 사고해보는 것은 인간으로서 기본 덕목을 기르는데 필수적이다. 말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 위한 밑바탕이 된다. 물론 모두가 그걸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것들을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능과 대입에 도움이 안되는 과목들에 대해 아이들 학습로드만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는 학부모들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학습 로드를 가중시키는 것은 학교가 아니라,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 부모들이다. 어차피 과목수 줄여도 애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학원 뺑뺑이를 시키는건 매한가지일 것 아닌가. 문이과를 분리하고, 미적분을 없앤다 한들, 애들이 학원을 덜 다니고, 놀아야 할 때 더 놀았을까? 아니다.
또 한 가지, 그 시절은 점수가 전부인 것처럼 돌아간다. 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해도, 그냥 점수로 요약된 후 대입에 소비하고 끝내버린다. 그리고 그 스토리들은 스스로 잡고 있지 않는 이상 휘발된다. 마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다행스럽게도 이 현상은, 연구/사무직군에 대한 투자 대비 매력도 하락으로 인해 꽤나 완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자 스탯이 많이 찍혀 있는 대로 직업을 가지고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의 중심에 있는 세대는 기성세대들과 한바탕 침튀기게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없는, 반대로 강요받을 수는 있는 그것이 바로 케어를 받는 대가이다.
어른이란
어른은 뭐 크게 대단한게 아니다. 내가 정의내린 어른의 기준은, 그냥 자기가 자기 입에 풀칠하는걸 스스로 하는가이다. 경제적인 이야기를 한거같지만, 그걸 시작으로 어른이 가지는 힘든 점과 좋은 점이 모두 따라온다. 구분하기 쉽도록 예시를 두 개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어른일까? 만약 부모님과 함께 사는데, 그 가구에서 경제적으로 일조하고 있다면 어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모든걸 빌붙으며 자기가 번 돈을 그저 모으고 있다면, 그건 어른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반발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자기 나름의 계산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앞으로의 삶에 아주 유리한 방향은 맞기 때문이다.
- 부부 중 한 명이 전업주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 아닐까? 아니다. 어른이다. 부부는 법적으로 경제공동체로 묶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기여하는가가 중요하다. 전업주부는 가사노동을 통해 그 가정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외식, 돌봄 및 교육에 관한 비용이 추가로 들게 된다. 근데 만약 전업주부이면서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면? 맞다. 그건 어른이 아니다. 만약 그 부부가 이혼했을 때, 한 쪽이 감정적인 부분 이외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한 쪽이 어린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의할 것이 있다. 어른이 꼭 더 좋고 훌륭하고,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개념은 오류다. 모두 그냥 인격체다. 부모님과 함께 살며 자기 몫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은 결국 잘될 것이다. 감정이나 이상보다는 현실을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케어를 하는 주체가 객체를 그정도로 소중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그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난 어른으로서 살기를 택했다. 그래서 위와 같은 기준에 따라, 일산의 부모님 소유 주택에서 지하에 방을 얻어 살 때, 매달 월세 명목으로 30만원을 부모님에게 송금했다. 증여세, 상속세 등의 세금 관점에서 봤을 때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이게 바로 적당한 집안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내 기준을 지키기 위해 일정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것이 내 특권이다. 만약 우리 집안에 재산이 많았다면 이건 꿈도 못 꿀 것이다. 나라로부터 뚜드려맞을 세금폭탄이 두려워서라도 자기 기준을 져버리고 세금에 최적화된 재무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걸 모두 포기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마음먹기 더 어렵겠지만 말이다.
어른이 되면서 힘든 점
생각보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게 힘들다. 어른은 곧 경제적 독립이라 했다. 그 독립은 일자리를 구하거나 사업을 해야 가능해지는데, 결국 사회의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철광석을 갈고 갈아 결국 어디든 맞는 자리에 끼워넣는 것인데, 이게 쉬울 리가 없다. 수많은 충돌과 연마를 겪으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게 되는데, 그 수준은 거의 생사를 오가는 수준이다. 부모와 학교의 보호를 받으며 자아관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린이의 특권이다. 복권을 긁기 전에 그 복권의 결과는 자기 원하는 대로 상상해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은 현실 속에 살아야 한다. 거기서 어린이는 한 번 이상 죽는다.
자기인식 자체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공학자와 기술자 중에서 뭘 할 것이냐 하고 이야기하며 은근하게 기술자를 까는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학교를 다녀놓고, 난 기술자가 됐다. 마치 건축공학과에서 5년(설계 포함 과정)을 수료해 놓고, 자기가 설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현장의 인부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깎아놓고 보니 그곳이 자기 자리였던 것이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도 정말 어렵다. 하루 24시간 중 8시간을 업무에, 8시간을 수면에 할애하고 나면, 8시간이 남는데, 여기서 3시간은 요리하고 먹고 정리하는데 써야 하고, 2-3시간은 출퇴근에 사용해야 하고, 남은 2-3시간에 비로소 자기계발과 여가활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조차도 야근 한 번에 날아가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다른 뭔가를 줄인다. 잠을 줄이거나, 집안일을 미루거나, 끼니를 패스트푸드로 대체하거나, 거르거나. 그리고 그것이 건강을 서서히 망친다.
어른이 되면서 얻는 것
경제적 독립은 아주 많은 것들에서 자신을 해방시킨다. 대표적인 것이, 부모님이 내 삶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된다. 내 앞가림만 제대로 하면, 터치를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대학 졸업 후에 오히려 라크로스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과거 부모님은 내가 라크로스 때문에 고생했을 때 “니 앞가림에 더 신경써라” 라는 꾸중을 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라크로스에서 얻은 것들이 더 많음을 인정해 주신다. 심지어는 기부를 해도 그냥 “이제 그럴 때가 됐구나?” 해주신다.
기한없는 공부도 가능해진다. 학창시절의 시험이라는 제도는 공부의 기한을 정해버리고, 깊게 파는걸 방해한다. 깊게 파면 시간이 많이 들고, 시험 점수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의 공식을 그냥 외우면 한 시간 정도에 몇 문제를 맞출 기반을 얻지만, 그 근의 공식을 직접 유도하고 있으면, 유도 후에 시험을 위해 외우는 시간이 따로 더해지거나, 실제 시험장 가서도 시간을 들여서 근의 공식을 유도해야 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그에 반해, 기한이 없는 공부는 근의 공식을 유도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공부의 맛이다. 새로운 것을 이해한 순간, “아하!”와 함께 쾌감을 느낄 것이다. 마치 머리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갑자기 정렬하면서 그 사이에 길이 직선으로 뚫리는 느낌이다.
또한, 만약 자신이 뽑기운이 좋지 않아 어릴 때부터 과한 짐을 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자립을 계기로 그 짐을 벗어던질 수도 있다. 부모는 자식을 “태어나지게” 한 대가로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 자식의 탄생은 부모의 선택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덴 자식의 선택권이 더 크다. 자식이 적당할 때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의할 기회는 꼭 온다. 그리고 그 시점에 자식에게 선택권이 생긴다.
사회에서 갈리는 과정 또한 결과적으로 이득이다. 자신이 본래 가야 했던 자리를 알고 난 이후엔 묘한 안정감도 얻는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미래를 그리는 것은 엄청난 불안을 수반한다. 그 사람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장단점을 명확히 알아가게 된다. 직접 부딪혀 봤고, 실패할건 실패하고 성공할건 성공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장단점을 아는 상태에서 미래를 그리면 미래를 좀 더 명확하게 그릴 수 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안다고 해도,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만 집중한다면, 적어도 졌잘싸는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 방법은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